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제4892호) 조선시대 여성의 사치, 높이 30cm 다리

튼씩이 2023. 12. 16. 15:38

"옛사람이 다리(가체)를 높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궁중(宮中)에 이런 제도가 없었으니, (가운데 줄임) 풍속이 갈수록 사치스러운 데로 흘러 다리 한 꼭지의 비용이 자못 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는 열 집의 재산보다 많으니, 이는 곧 고려말의 퇴폐한 풍습이다.“ 이는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1757) 12월 16일 기록으로 여성들이 치장을 위해 머리에 높은 가발을 얹는 풍조를 개탄하여 임금이 다리를 얹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다리는 큰머리, 가체(加髢), 월자(月子), 월내(月乃)라고도 불렀는데 처음 문헌에 나오는 것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리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성종 때는 높이가 무려 30cm까지 되었다고 하지요. 이때 다리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무려 당시 기와집 2~3채 값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 보면 13살 어린 신부가 다리 때문에 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 신윤복의 <미인도>, 114.2×45.7㎝,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 왼쪽 /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의 <미인도>, 117.0×49.0㎝, 해남 녹우당 소장

 

영조 임금은 다리 금지령을 내려 기본 쪽머리와 족두리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번에는 온갖 보석으로 꾸며 사치스럽게 만드는 족두리가 유행하는 풍선효과가 발생하였고 결국 7년 만에 다리를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미인도는 혜원 신윤복의 그림과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이 그리 미인도가 있는데 두 미인도 모두 여성의 머리에 다리가 얹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