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국어로 바라보기 - '국어'의 초석을 놓은 고종과 주시경

튼씩이 2022. 4. 18. 12:54

 

한글, 드디어 ‘국문’이 되다

 

 

1894년(고종 31) 11월 21일, 한글은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된다. 창제된 지 약 450년 만이다. 고종은 칙령을 내려 법률과 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漢文)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섞어서 쓸 것을 규정했다. 공문서를 기본적으로 한글로 작성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 번역을 덧붙이거나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의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함으로써 한글 본위로 공문서를 작성한다는 원칙을 실행했다.

 

그동안 한글은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언문(諺文,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 불리며 천시되던 한글이 국가가 제도적으로 인정한 국문이 되어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쓰이게 된 것이다. 특히 고종은 칙령에서 1순위가 국문이고 한문 번역본과 국한문체는 그 다음임을 분명히 했다. 고종의 칙령으로 한글은 완전한 ‘우리글’로 자리매김하는 시작점에 서게 된다.

 

주시경과 <독립신문>

 

고종에 의해 한글 본위의 정책이 천명되었지만, 신문과 공문서는 대부분 국한문이 혼용된 형식으로 작성되었고 근대 지식인들조차 한문이나 국한 혼용문을 주로 썼다. 한글의 생활화를 널리 실천해야 할 근대 지식인들이 한글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국어의 규범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관에 따라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을 적었다. 한글이 소리를 잘 표현하는 글자이기는 하지만, 공인된 철자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말을 한글로 적더라도 사람마다 표기가 달랐던 것이다.

 

‘혼돈 상태’에 놓인 우리 국어사에 한 줄기 밝고 뚜렷한 빛과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주시경과 <독립신문>1)이다.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며 주시경을 독립신문의 교보원(校補員, 오늘의 편집 기자 겸 교열 기자)으로 채용했는데, 신학문을 배우며 진작부터 자국어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주시경은 운명처럼 국어 연구의 길을 걷게 된다.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국문 표기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 주시경은 신문사 안에서 국문 동식회(國文同式會,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만든 최초의 국어연구회)를 만들고 국어 문법과 한글 표기법 연구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서재필의 국민 계몽 운동을 지원하면서 한글 전용, 한글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를 실천했다.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은 구독료를 싸게 해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두루 볼 수 있도록 했다. 구독료를 싸게 한 대신 광고를 게재해 신문 경영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이 역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경영 방법이었다.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제작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데다 다양한 한글 광고를 실어 독자들에게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독립신문>은 처음에 300부로 시작해 얼마 가지 않아 그 10배인 3,000부를 찍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국민들이 한글을 공용 문자로 인식하고 사용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어와 한글 표기법 연구가 이루어지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한글’이 ‘한글’이 되기까지

 

 

1898년, 러시아의 불합리한 절영도 통치 요구를 규탄하던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되자 <독립신문> 간행에 크게 이바지했던 주시경도 신문사를 퇴사한다. 독립신문을 나온 후에도 주시경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국어 사랑은 결코 꺼질 줄 몰랐다. 주시경은 <제국신문>에서 기재(記載, 일종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인 스크랜턴(W. B. Scranton)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수십 개의 학교를 오가며 국어 교사로서 강단에 섰다. 뿐만 아니라, ‘국문 연구소’에서 진행한 국문 표기법 정비 작업에 위원으로 참여하여 그 연구 결과물로 1909년 12월 ‘국문연구의정안’을 제출했다. ‘국문연구의정안’은 당시에는 공포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은 계몽 운동과 한글 교육,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국어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 다양한 문법서를 씀으로써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으며, 표의주의 철자법 확립, 한자어의 순화, 한글 풀어쓰기 제안 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주시경은 한글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를 길러 내기도 했다. ‘국어 강습소’, ‘조선어 강습원’ 등을 개설해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주시경은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그의 제자들이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며 우리말 사랑의 명맥을 잇게 된다.

 

1)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만을 사용한 최초의 신문이다.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은 현재까지 ‘신문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 참고 문헌


최경봉, ≪한글민주주의≫, 책과함께, 2012.
김흥식, ≪한글전쟁≫, 서해문집, 2014.
정주리, 시정곤, ≪조선언문실록≫, 고즈윈,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