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언어의 숨겨진 힘 - 당신은 어떻게 말하고 계십니까?

튼씩이 2022. 4. 21. 12:53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언어 능력과 어휘력은 서로 비례 관계이다. 언어 능력이란 곧 모어의 어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휘력은 비단 우리가 말을 구사할 때나 글쓰기를 할 때에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가, 사고가 언어를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논쟁이 이루어져 왔는데, 이는 어휘력과 사고력이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휘를 1천 개 알고 있는 사람보다 1만 개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유연하고 다채롭게 사고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휘력이 향상될수록 우리의 사고력 역시 향상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있다. 미국에서 가정 환경과 경제적, 사회적 환경이 비슷한 고등학생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실험을 진행했다. 한 집단에는 정규 과정만을 가르쳤고, 다른 집단에는 정규 과정 외에 특별 어휘 학습 과정을 추가로 가르쳤다. 어휘 학습을 별도로 해 온 집단의 학생들은 어휘 학습을 추가로 하지 않은 집단그룹의 학생들보다 성적이 훨씬 높았는데, 놀랍게도 어휘 관련 과목뿐만 아니라 어휘와 관련이 없는 다른 모든 과목의 성적도 다 앞선 것으로 드러났다.1) 이는 어휘력이 풍성해질수록 사고력도 더 커진다는 것을 방증한다.

 

같은 이치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도 단순히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가치관도 이해하게 되므로 사용하는 언어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용자의 시야가 그만큼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국어 생활에서 무분별한 외국어와 외래어 사용을 경계하는 것도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후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으로 우리말 속 왜색을 지워 나갔던 것도 식민지 시기 동안 핍박당한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혼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다.

 

바른 생각이 먼저인가, 바른 말이 먼저인가?

 

말은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한다.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말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른 말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쁜 말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피안 이론(Whorfian theory)’은 반대로 우리가 바른 말을 해야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우리의 관념이 언어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언어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뜻이다. 즉,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른 말을 할 수 있지만, 바른 생각은 또한 바른 말을 쓸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내 : (걸레로 방을 훔치고 있다.)
남편 : 청소하는 거야?
아내 : 네.
남편 : 도와줄까? 걸레 줘 봐. 내가 닦아 줄게.
아내 : 고마워요.

 

힘들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남자의 태도가 가정적이고 우호적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두 사람의 대화를 다시 살펴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이 연상이고 여성이 연하인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부부 사이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쓰고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남편은 무의식적으로 아내를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 그래서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미 언어에서 ‘평등한 부부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또 남편은 집안일을 하겠다고 말할 때에도 “도와까? 걸레 봐. 내가 닦아 게.”라고 말했다. 말 속에 ‘해 주다’라는 표현이 연속으로 나온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준다’는 것은 이미 그 일이 본래 자신의 몫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런 표현을 듣고 자란 가정의 아이들은 집안일은 아내, 즉 여성의 몫이고 남편은 부수적으로 ‘도와주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다. 말 한 마디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의 인식과 생각, 크게는 가치관까지 달라지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생각도 바뀐다

 

행동 심리학에 ‘일관성의 원리(Law of Consistency)’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한 번 내린 결정에 책임을 지려는 경향이 있다는 원리인데, 심리학자들은 이 일관성의 법칙이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말로 일단 내뱉고 나면, 그 말과 일치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원리를 뒷받침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연구원이 개인 물품을 해변에 둔 채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면 다른 연구원이 도둑으로 가장해 바다로 들어간 연구원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다. 이 실험의 피실험자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으로, 피실험자가 도둑을 저지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실험의 목적이었다. 스무 번의 실험에서 도둑을 저지한 사람은 단 네 명뿐이었다. 상황을 바꾸어 바다로 들어가던 연구원이 옆에 있던 피실험자에게 “제 물건을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럼요, 문제없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연구원이 바다로 들어가자 도둑 역할을 맡은 연구원이 앞선 실험과 동일하게 물건을 훔쳐 달아났는데, 이번에는 20명 중 19명이 자발적으로 도둑을 저지하고 도둑을 다그쳤다. 본인이 ‘물건을 봐주겠다’고 말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바른 말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특히 친밀한 관계인 가족 간이나 부부 간에는 일상적인 말투나 호칭 등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며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도덕성, 양성평등, 상호 존중 등 사람들의 근본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1) 김병완, ≪인생의 절반은 행복하게 살자≫, 라이온북스, 2012.

 

 

※ 참고 자료


이정자, ≪글쓰기의 길잡이≫, 국학자료원, 2005.
나임윤경, ≪여자의 탄생≫, 웅진지식하우스, 2005.
배상문,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북포스, 2009.
김홍진, ≪심리를 알면 설교가 보인다≫, 에세이퍼블리싱,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