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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위인 열전 - 한글로 소설 쓰는 사대부, 김만중

튼씩이 2022. 4. 25. 07:57

한글 문학을 사랑한 김만중

 

조선 후기 문신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한문학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던 당대 통념을 거부하고 ‘국문 소설’을 썼다. 한문을 떠받들던 당대 사대부들 속에서 그는 어떻게 한글로 소설을 쓸 생각을 했을까?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 호란(1637년)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면서, 형 김만기와 함께 홀어머니 윤씨 부인 슬하에서 성장했다. 윤씨 부인은 이조 참판 윤지(遲)의 딸로 명문가 출신답게 궁색한 살림 속에서도 아들들이 읽을 각종 서책을 구했고,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베껴 옮겨서 교본을 만드는 등 자식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또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학문을 익혀 소양을 겸비했던 윤씨 부인은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當律)≫ 등을 아들들에게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어머니 윤씨의 정성으로 배움에 대한 부족함 없이 자란 김만중은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 급제했으며 이후 대사간, 도승지, 대제학, 대사헌, 의금부 판사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친다. 김만중은 노론 중에서도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아 서인 세력의 중심에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어오다가 말년에 당파 싸움에 휘말려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51세 때인 1687년(숙종 13)에 장희빈의 아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했다가 함경도 선천으로 유배됐으며,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지 1년 만인 1689년,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했다가 또다시 남해로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김만중의 소설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고독한 유배지에서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인 ≪홍길동전≫이 나왔지만, 17세기 중반까지 국문 소설은 여전히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소설이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때였고 국문으로 쓴 작품이라면 더더욱 폄하되던 때였다. 그런데 김만중은 한자가 아닌 한글로 소설을 썼고, 완전한 소설 형태를 갖춘 장편 소설을 만들어 냈다. 김만중이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그가 국문 문학이 가지는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글 소설을 써야 할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사씨남정기≫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김만중이 마지막 유배지인 남해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사대부가의 처첩 갈등을 담은 가정 소설이다. 김만중이 이 소설을 한글로 쓴 목적은 ≪사씨남정기≫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한글을 아는 일반 백성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여 민심을 움직이고 여론을 형성해 임금인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사씨남정기≫는 최초로 처첩 간의 갈등을 소재로 한 가정 소설이지만, 그 이면에는 숙종이 인현 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의 부당성을 풍간하고 있다. 중국의 한 집안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본처인 사씨는 인현 왕후에, 첩인 교씨는 장희빈에, 사씨의 남편인 유한림은 숙종에 각각 대비되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유한림이 교씨의 간계에 넘어가 선량한 사씨를 축출하고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하지만 교씨는 간부와 밀통하며 남편 유한림을 모함하고 유한림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다. 유한림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고 풀려난 후 사씨를 찾아 다시 아내로 맞이한다.

 

숙종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쓴 ≪사씨남정기≫는 민간에 널리 퍼져 두루 읽혔다. 그리고 김만중의 의도대로 ≪사씨남정기≫의 결말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졌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인현 왕후가 복위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만중은 그보다 몇 해 전인 1692년에 유배지에서 눈을 감았기에, 그토록 바라던 인현 왕후의 복위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 후로도 ≪사씨남정기≫의 영향력은 계속 이어졌다. 소설에 사대부 취향의 고급문화를 접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으며, 처첩 갈등이라는 소재는 ≪장학사전≫, ≪소씨전≫ 등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김만중의 친필 원본인 ≪사씨남정기≫는 현전하지 않으나, 80여 종의 이본이 전해져 당대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즐겨 읽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각 이본은 내용상 차이가 거의 없으며 국문본과 한문본이 비슷한 비중으로 전한다.

 

어머니의 근심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구운몽≫

 

김만중은 어머니를 위해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썼다고 한다. ≪구운몽≫을 지은 배경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따르면,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어머니의 한가함을 달래 주고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이 소설을 지었다고 한다. 또 김만중의 일가에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 소설을 사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었다가 대신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소설을 지어 드렸다고도 전해진다. 어떤 연유였건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해 급히 지었다’는 점만은 공통된 부분이다.

 

≪구운몽≫은 선학(禪學)1)을 공부하던 성진이 팔 선녀를 만나 서로 희롱한 죄로 다 같이 저승으로 추방되었다가, 성진이 인간 세계에서 양소유로 환생하여 팔 선녀의 후신을 차례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 세계에서 양소유는 온갖 부귀를 누리고 팔 선녀와 함께 향락을 일삼지만, 만년에는 인생무상을 깨닫고 다시 성진으로 돌아간다. ≪구운몽≫은 인간의 부귀영화가 모두 일장춘몽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동시에 인간 세계에서 양소유와 팔 선녀가 각각 인연을 맺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통해 ‘연애 소설’로서의 면모도 보여 준다. 특히 팔 선녀의 후신인 여덟 명의 여인들은 각기 개성이 달라 양소유와 여덟 가지의 다채로운 연애사를 보여 주는데 이는 김만중이 평생을 수절하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 윤씨에게 재미난 읽을거리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구운몽≫이 남녀의 연애를 비중 있게 다뤘다고 해서 단순히 연애 소설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이나 인물, 심리는 우아하면서도 품위 있는 문체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또 철학적이면서도 사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수준 높은 사대부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씨남정기≫와 마찬가지로 ≪구운몽≫도 후대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옥루몽≫, ≪옥련몽≫ 등 ≪구운몽≫의 내용을 토대로 한 작품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구운몽≫은 국문본과 한문본이 모두 전하는데 그중 무엇이 원작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김만중은 1687년(숙종 13년) 선천 유배 이후에 쓴 ≪서포만필(西浦漫筆)≫이라는 수필·비평집에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전후사미인곡(前後思美人曲)>과 같은 국문 가사 작품을 중국의 <이소(離騷)2)>와 맞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극찬하고, 조선 사람은 조선의 말로 글을 써야 말 본연의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1) 불교에서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2) 중국 초나라의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난 후의 시름을 노래한 것으로 작품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 참고 문헌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이수웅,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다락원, 2010.
김명호 외 13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