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언어의 숨겨진 힘 - 익명의 눈가리개를 쓴 '악플'

튼씩이 2022. 5. 5. 09:59

 

과거에는 정보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며 정보의 전달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오늘날에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 또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이 활성화되면서 인터넷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실현을 극대화하였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 타인의 권익을 침해하거나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는 글, 일명 ‘악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악플은 ‘악성 리플(reply)’의 준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상대방을 마주한 상황에서는 결코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을 욕설과 비난이 유독 온라인에서 독버섯처럼 돋아난 이유는 무엇일까?

   

‘투명 망토’가 주는 쾌감

 

온라인상에서 한 개인은 투명 망토를 입은 사람과 같다. 본명이 아닌 아이디나 별명을 사용할 수 있고, 다른 개인 정보 또한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익명성은 타인의 시선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소신껏 개진할 수 있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나,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 윤리를 침해할 정도의 심각한 악플이 횡행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악용해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사람을 가리켜 ‘악플러’라 부른다. 악플러가 악플을 즐기는 이유는 이른바 ‘길티플레저(guilty pleasure)’와 연관이 있다. 길티플레저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 즐거움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는 양가감정을 뜻한다. 폭식, 과소비 등과 같은 자신의 행동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끼는 동시에 쾌감을 함께 맛보는 것이 길티플레저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상대방에게 심한 욕설이나 비난을 가함으로써 일종의 즐거움을 얻는 악플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일상생활에서 분노가 제대로 표출되지 못하거나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악플은 ‘대리 만족’을 준다. 오프라인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분노를 익명성에 기대어 온라인에서는 스스럼없이 표출하는 것이다.

     

배가되는 ‘폭력성’

 

미국 스탠퍼드대의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사람이 익명의 옷을 입으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실험했다. 교수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을 2개 그룹으로 나누고 상대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이 때 한 그룹은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게 한 반면 다른 한 그룹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려 익명으로 실험에 참여하게 하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익명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2배 이상의 전기 충격을 가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익명성이 인간의 폭력성을 얼마나 표출시키는가를 보여준 실험이었다.

 

악플러가 무리를 이루면 악플의 수위는 더욱 심해진다. 집단의 의사 결정이 개인의 의사 결정보다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행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라고 한다. 한 입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형성한다. 집단이 형성되면 편파적인 정보와 의견만을 나누게 되고, 집단의 사고와 의사 결정은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쏠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 극화 현상을 통해 양산된 악플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집단 악플의 피해자는 억울함과 우울함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급기야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집단을 이룬 악플이 얼마나 위험하고 폭력적인가를 방증한다.

     

악플 뒤에 숨은 민낯의 씁쓸함

 

최근 연예인 등 유명인이 허위 사실 유포와 악플에 대해 강경히 대응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고소를 하더라도 피의자를 만나 사과를 받고 선처하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합의 없이 강경 대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악플로 인해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각종 모욕과 비방 글에 대해 적극적인 처벌 의사를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악플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하거나 묵인하면 악플이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도 형사 고소로 이어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

 

몇 달 전, 한 인기 연예인은 누리소통망(SNS)를 통해 악플러들을 고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그의 누리소통망(SNS)에는 악플을 달았던 것을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는 댓글이 달렸다. 익명성에 기대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형사 처분이 코앞에 닥치자 반성하는 태도를 취하는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감출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익명성은 사실 손바닥만 한 눈가리개에 불과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악플러들은 익명성이라는 눈가리개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중구난방으로 칼을 흔들고 있다. 눈가리개에 의존해 나의 인격도 눈가리개의 크기만큼 구겨 넣을 것인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에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 참고 자료


최창호,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가서원, 1995.
스튜어트 서덜랜드, ≪비합리성의 심리학≫, 교양인, 2008.
김헌식,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 위즈덤하우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