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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위인 열전 - 유교 사상을 널리 퍼뜨리리! 한글 실용 시대를 연 성종

튼씩이 2022. 5. 19. 07:58

 

엘리트 코스를 밟고 왕이 된 성종

 

예종(조선 제8대 임금, 세조의 차남)은 세조(조선 제7대 임금)의 뒤를 이어 강력한 임금이 될 자질을 가진 왕이었지만 재위 1년 만인 1469년,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스무 살에 요절했다. 예종의 뒤를 이을 후보에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예종의 형인 죽은 의경세자의 두 아들 월산군,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이 있었다. 그들 중 후계 서열 3위였던 자을산군이 13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제안대군이 네 살밖에 되지 않아 보위를 잇기 어렵고, 후계 서열 2위인 원산군은 병약한데다 성품과 자질이 자을산군보다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성종이 스무 살의 성인이 될 때까지 대비전에서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세조의 부인이자 인수대비(성종의 모후)의 시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았는데, 생전에 세조를 보필해 주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내왔던 정희왕후는 정치 감각이 탁월했다. 무엇보다도 정희왕후는 권력에 물들거나 요동하지 않고, 오직 손자인 성종이 굳건한 임금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희왕후의 든든한 보호 아래 성종은 군주 수업을 착실히 받으며 모범적인 왕으로 성장했다.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왕이 탄생한 것이다.

 

예종의 통치 기간이 워낙 짧았으니, 예종을 제외하고 그 전후의 임금인 세조와 성종을 비교해 보면 두 왕이 매우 상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는 성정이 호방하고 문무에 두루 재능이 특출 난 인물이었다. 군주를 모시는 입장에 있다가 반정을 통해 조카인 단종(조선 제6대 임금)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제압했다. 또 조선이 성리학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반면 성종은 13세에 즉위해 성인이 될 때까지 신하들에게서 군주 수업을 받으면서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도학 군주로 성장했다.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성정은 어질었고 신하들을 온화하게 대했다. 그는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경연 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성종은 세조처럼 문무에 두루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정사를 돌보았다. 이렇게 하나에서 열까지 상반된 세조와 성종에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데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세조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해 민간에 널리 전했다. 유학을 숭상했던 성종은 조선의 유교화를 위해 한글을 이용했다. 한글의 유용성을 간파했던 두 왕은 서로 다른 목표 성취를 위해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훈민정음, 유교 전파에 쓰이다

 

성종 15년의 일이다. 홍문관에서 일부 조정 신하들이 재산을 지나치게 늘렸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비판의 대상이 된 고위직 신하들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직 상소를 올리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성종은 언문(한글을 낮잡아 이르는 말)으로 쓴 공문을 내려보내 재상들을 감싸며 그들의 사직을 만류했다. 임금의 옹호를 받은 신하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역시 언문으로 임금의 글에 화답했다. 성종 23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성종이 불교를 억제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금승법’을 제정하자 불교 신자였던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언문으로 반대 성명을 내며 강력히 반대했다. 유교국가 건설의 원대한 꿈을 품은 대신들은 인수대비를 찾아가 뜻을 거두어 달라며 간곡히 설득했는데, 이에 인수대비는 한 술 더 떠 안순왕후와 연명으로 언문 교지를 내리며 금승법을 반대했다. 나라의 중대사에 임금과 대비전, 궐내 신하들이 종종 언문을 사용할 만큼, 한글은 성종 대에 한문과는 또 다른 공식 문자였던 셈이다.

 

성종은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퍼진 한글을 유교 전파를 위한 도구로 선택했다. 1481년(성종 12) 성종은 세종 때 발간된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해 편찬했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세종 16)에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에 의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이다. 같은 해에 《삼강행실 열녀도》도 한글로 번역해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 배포하고, 시골 마을의 부녀자까지 모두 강습할 수 있도록 했다. 한글로 된 유교 서적을 전국에 퍼뜨린 후, 성종은 ‘정문’과 ‘복호’ 제도로 백성 교화에 나섰다. 정문이란 열녀문이나 효자문을 세우는 것이고 복호란 열녀나 효자로 선정된 백성의 요역과 전세 외의 잡세를 면해주는 것이다. 즉, 유교 질서에 부합하는 모범 사례자들이 정문과 복호의 혜택을 누렸고, 백성들은 정문과 복호 사례자가 되기 위해 유교적 도리를 실천했다.

 

한글로 새롭게 번역된 《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 열녀도》가 민간 교육서로 전파되고 정문과 복호라는 실제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자 조선은 급속히 유교화되었다. 유교 질서가 잡히면서 조선의 신분질서가 고착화되었고 신분을 대하는 관념도 건국 초와는 많이 달라졌다. 성리학자들이 군주 수업을 한 결과는 유학적 국가 건설을 꿈꿨던 신하들의 바람대로 유교 원리에 충실한 도학 군주를 만들어 냈고 그 도학 군주는 한글을 이용해 신하들이 원하는 세상을 현실화했다.

 
 

※ 참고문헌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2003.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김슬옹,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 한국문화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