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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 건물의 위계: 전당합각재헌루정
튼씩이
2022. 5. 28. 09:51
4. 건물의 위계: 전당합각재헌루정
궁궐에서는 위로 임금으로부터 최하층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의 기거 활동 구역이 나뉘어 서로 섞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같은 구역 안에서도 건물들은 제각각 그 주인의 신분과 직임 및 건물의 용도에 따라 위계(位階)를 달리하였고, 위계에 따라 외형이 달라졌고, 기능도 달라졌다. 이러한 각 건물의 위계와 형태, 기능은 그 이름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독립적인 건물에는 거의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인데 비하여 이름의 끝에는 건물임을 뜻하는 글자를 붙였다. 그 끝 글자들은 다양하지만 이를 간추려 보면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 등 여덟 자로 정리된다. 이 여덟 글자는 엄격한 법칙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 순서대로 건물들의 위계(位階)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전(殿)'은 가장 격이 높은 특급의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가 크고 품위 있는 치장을 갖추었다. 궁궐에서 전은 임금과 왕비, 혹은 전 왕비, 곧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주인으로 쓰는 건물이다. 임금과 왕비 이하 신분의 사람들은 ‘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비록 세자라 할지라도 ‘당’의 주인이 될 수는 있으나, ‘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전’에서는 일상적인 기거 활동보다는 의식 행사를 비롯하여 공적인 활동이 주로 이루어졌다.
'당(堂)'은 전에 비해서 규모는 대체로 조금 작고, 그 위계는 한 단계 낮은 건물이다. 세자를 비롯하여 후궁 등이 쓸 수 있는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 ‘당’이다. 궁궐에서 ‘당’은 공적인 활동보다는 조금 더 일상적인 활동에 쓰였다. 하지만 엄격히 구별되기보다는 ‘전’ 가까이 있으면서 ‘전’을 보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합(閤)'이나 '각(閣)'은 ‘전’이나 ‘당’에 비해 한 등급 더 낮은 건물이다. 독립된 건물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전’이나 ‘당’ 부근에서 그것을 보위하는 기능을 한다. 자연히 규모면에서도 ‘전’이나 ‘당’보다는 떨어진다. 둘 가운데 ‘합’은 ‘각’보다 격이 분명하게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보다 약간 높거나 서열이 앞서는 정도의 구별은 있었다. 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합’은 여성이 주인인 경우가 많았다.
'재(齋')와' 헌(軒)'은 가장 흔하다. 평균적인 등급의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나 왕비 같은 주요 인물도 물론 ‘재’나 ‘헌’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 활동 공간이다. ‘재’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이거나 혹은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는 건물이다. 이에 비해 ‘헌’은 대청마루 자체나, 대청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건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일상적 주거용보다는 상대적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공적 일을 처리하는데 쓰는 경우가 많았다. ‘재’나 ‘헌’은 그런 목적에 맞게 실용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
'누(樓)'는 기본 평면에서 계단을 올라가 그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는 공간이다. 경회루(慶會樓)나 광한루(廣寒樓)처럼 큰 다락집 형태를 띠기도 하고, 건물의 일부로서 누마루방 형태를 띠기도 한다. 독립 건물인 ‘누’는 주위 경관을 감상하는데 주로 쓰였다. 건물의 일부인 ‘누’는 서늘하게 생활하는데, 또는 서책이나 뜨겁지 않게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물건을 보관하는데 쓰였다. 2층 건물인 경우 1층에는 ‘각(閣)’, 2층에는 ‘누(樓)’가 붙는다.
'정(亭)'은 흔히 정자(亭子)라고 하는 것으로, 연못가나 개울가, 또는 산 속이나 바닷가 경관이 좋은 곳에 있어 휴식이나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정은 주변을 보기 위한 곳이므로 거의 벽이 없이 트여 있다. 바닥은 마루나 전돌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규모는 작아서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정도가 보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