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대한제국의 탄생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이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이미 동아시아적 계층질서를 부인하고 ‘제국’을 칭했듯이 대한제국 또한 주권국가로서 중국(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의 의지를 제호(帝號)로써 천명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정운영의 면모를 일신하는 차원에서 칭제를 적극 추진했다. 칭제 상소에는 전․현직 관료층을 비롯하여 지방의 유학(幼學), 관학유생(館學儒生), 개신유학자, 시전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칭제 상소문들에서 주장하는 칭제의 논리는 대부분 자주독립 국가에서 스스로 존호(尊號)할 수 있고, 존호를 통해 국가의 위의(威儀)를 높여 자강(自强)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주 독립한 국가는 제호(帝號)도 자주적으로 칭할 수 있다는 주장, 유럽제국과 평등한 외교를 펼치는 데는 동양사회에서만 통하는 ‘제(帝)’와 ‘왕(王)’의 구별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주장들은 이미 전통적인 동아시아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나아가 만국공법에 의거하더라도 자주 국가는 스스로의 뜻에 따라 존호할 수 있으므로 타국이 그것을 승인할 권리는 없다는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까지 등장했다. 제국 칭호를 통해 ‘자주’와 ‘자강’을 달성하고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주권국가로 행세할 수 있다는 칭제론은 일부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들의 반대와 독립협회계열 개화인사들의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제국 체제를 출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1897년 8월 15일자로 새 연호도 광무(光武)로 정해놓은 고종은 칭제상소들을 통해 광범위한 여론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는 10월 3일, 마침내 칭제를 재가하고, 10월 11일, 새로 선포할 황제국의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결정했다. 고종은 ‘대한’이라는 국호를 선택한 근거로 조선이 삼한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것과 각국의 외교사절들이 이미 ‘한(韓)’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즉“우리나라는 삼한의 땅이다. 이를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대한(大韓)이라 해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각국의 문자를 볼 때마다 조선(朝鮮)이라 하지 않고 한(韓)이라 했으니...”라고 하였고, 이에 특진관 조병세는“조선은 기자(箕子)가 옛날에 봉(封)함을 받은 국호이므로 당당한 제국이 그 호(號)를 계승함은 옳지 않습니다”라는 논리로 이에 화답했다. 중국(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구래의 사대관계로부터의 단절을 국호에 담고자 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칭제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대체로 주권국가로서 실제적인 자주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승인하는 태도였다. 청은 이미 형해화된 조공-책봉관계 인식을 근저에서 청산하지 않은 채 마지못해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에 동의하는 수준이었다(1899년 한청통상조약 체결). 결국 고종과 대한제국이 칭제와 국호 변경을 통해 획득하고자 했던 구래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청산과 근대적 만국공법 체제 편입은 단순히 나라이름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주, 독립, 자강을 획득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2. 환구단과 황제즉위식
1897년 10월 12일 새벽 2시, 고종은 황태자와 함께 환구단에 행차하여 황금색 어좌에 올라 황제위에 올랐다.『독립신문』은“광무 원년 십월 십이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 년을 지내드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년을 왕국으로 지내며 청국에 속하야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야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샤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샤 이달 십이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이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나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나리오”라고 그 의의를 평가했다.
또한 고종이 즉위식 전날 환구단에 행차하여 제사에 쓸 물건들을 살펴보고 돌아온 행사 분위기를 묘사하기를“십일일 오후 두시 반에 경운궁에서 시작하야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정제하게 섰으며 순검들도 몇 백명씩 틈틈이 정제히 벌려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내며 좌우로 휘장을 쳐서 잡인 왕래를 금하고 조선 옛적에 쓰던 의장 등물을 고쳐 누른 빛으로 새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으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여 지나는데 위엄이 장하고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나더라. 육군 장관들은 금수를 놓은 모자들과 복장을 하고 은빛같은 군도들을 금줄로 허리에 찼으며 또 그중에 옛적 풍속으로 조선 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더러 있으며 금관 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잇더라. 어가 앞에는 대황제 폐하의 태극국기가 먼저 가고 대황제 폐하께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시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타시고 그 후에 황태자 전하께서도 홍룡포를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시며 붉은 연을 타시고 지나시더라.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친히 감하신 후 도로 오후 네 시쯤에 환어하셨다”라고 보도했다. 고종과 황태자가 경운궁을 나서 환구단으로 행차할 때 연도 좌우에 각 대대 군사들과 순검들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행인들을 통제하고,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했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복장을 한 육군 장교와 관인들이 행차를 수행하고, 군인들 중에는 신식 군복 외에 옛 조선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는 묘사이다. 황제와 황태자의 어가는 각각 금색과 홍색 연으로 어가 앞에 태극기를 앞세웠다는 것은 이미 이때 대한제국의 공식 국가 표상, 혹은 황제의 상징으로 태극기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어서 즉위식과 당시 도성 내 분위기에 대해서도“십이일 오전 두시에 다시 위의를 베푸시고 황단에 임해서 하느님께 제사하시고 황제위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오전 네 시 반에 환어하셨으며,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 폐하께와 황태자 전하께와 황태자비 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며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 십일일 밤에 장안 사사집과 각전에서는 색등불을 밝게 달아 장안 길들이 낮과 같이 밝으며 가을달이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치더라. 집집마다 태극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지심을 표하며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규칙 있고 예절 있게 파수하여 분란하고 비상한 일이 없이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즐거운 빛이 나타나더라. 십이일 새벽에 공교히 비가 와서 의복들이 젖고 찬기운이 성하였으나 국가에 경사로움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다 중한고로 여간 젖은 옷과 추움을 생각지들 아니하고 정제하게 사람마다 당한 직무를 착실히들 하더라”고 보도했다.
환구단 내에서의 즉위식과 고유제는 비공개로 열렸으므로 구체적인 절차는 묘사할 수 없었지만, 황제폐하께서 ‘일, 월, 성, 신’을 금으로 수놓은 황룡포를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고 경운궁에서 환구단으로 거동할 때 백관들은 금관조복을 하고 어가를 모시고 환구단에 가서 ‘각각 층계에 서서 예식을 거행’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예식을 마친 후에는 대군주 폐하께서 대황제 폐하가 되신 것을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절차가 있었고, 이어서 13일에 대황제 폐하께서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황제 위에 나아감을 선고하고 각국 공사가 하례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여기에 “지금부터 더 열심히 세계 각국과 동등하게 대접받기를 노력하라”고 덧붙임으로써,『독립신문』은 황제 칭호만으로 자주독립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에 걸맞는 문명개화가 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한으로 국호 변경을 알리는 10월 16일자 기사에서는 논설 초두에 본문보다 큰 글씨로 ‘금월 십삼일에 나리신 조칙으로 조선 국명이 변하여 대한(大韓)국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조선 인민이 대한국 인민이 된 줄로들 아시오’라고 공지했다.
이러한『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 당시 도성 내 분위기는 한마디로 새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는 밝고 즐거운 기운이 넘쳐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색등불을 밝게 달아 가을달과 함께 낮과 같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모습, 제복을 입은 병정과 순사들이 질서있게 거리를 오가며 행사를 지원하는 모습 등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새 황제국의 광경이었다. 기사에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황제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도성 내 인민들 혹은 지방에서 상경한 관인들에 대해 황제 행렬 주변의 질서 유지를 위해 각대 군사와 순검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또한 집집마다 태극기나 색등불을 달도록 지시하고 점검하는데는 한성부 관리들이나 오부(五部)에 거주하는 주민자치 조직이 총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앞세운 황금색 어가에 황룡포에 면류관을 쓴 대황제 폐하가, 뒤이어 홍룡포를 입은 황태자의 붉은 연이 지나가는 행렬 모습은 문자 그대로 화려한 군주의 탄생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고 색등불을 대낮같이 밝힘으로써 충군애국지심을 표현한, 혹은 표현하도록 지시받은 도성 내 인민들은 바야흐로 근대국가의 충량한 주민으로 동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새로운 황제국으로서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거듭나게 된 인민들은 국가행사 때마다 등장하는 태극기를 국가적 표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의 태극 사괘기에서 출발하여 대한제국기에 관청은 물론이고 민가에서도 국경일이나 행사 때마다 게양하게 된 태극기는 이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가적 표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황제 행렬의 의장물은 기사에 보도된 대로 ‘조선 옛적에 쓰던 의장 등물’을 고쳐 단지 ‘누른 빛으로’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었다. 즉 황제국 선포와 화려한 즉위식 행사는 대내외에 새 시대의 새 국가가 탄생했음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출범 초기의 대한제국에는 사고방식은 물론 의장 등에서도 구시대의 잔유물에 해당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사실 황제의 즉위식을 환구제와 함께 치러야 한다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대표적인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중국의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천지에 대한 제사를 행함으로써 대한제국의 황제위에 오른다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구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만국공법 체제 하의 주권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으로서는 아이러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기적 차원에서 전통적 의식과 근대 세계가 중첩하는 대한제국 출범 당시에는 구래의 의장물을 앞세운 근대적 황제 행렬이 기묘하게 동거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