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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자 - 세자란 누구인가
튼씩이
2022. 6. 20. 08:01
조선의 세자
정 재 훈 (경북대)
1. 세자란 누구인가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세자는 왕조시대 당대의 국왕을 이어서 다음 대의 국왕이 되는 후보자를 가리킨다. 세자를 가리키는 말은 동궁(東宮)ㆍ저궁(儲宮)ㆍ춘궁(春宮)ㆍ이극(貳極)ㆍ정윤(正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존칭어로는 저하(邸下)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세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세자인데, 이 용어는 원래 고려 말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태자가 격하되면서 쓰이게 된 것이다.
세자 또는 태자는 우리 역사에서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왕위의 부자세습이 결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세자가 존재하게 되었고, 이후 대체로 장자로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고려 때의 〈훈요십조〉에서는 이를 규범화하기도 하였다. 즉, 적자(嫡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지만 원자가 불초(不肖)하면 그 차자(次子)에게 전하고, 차자도 불초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전해 대통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이러한 원칙이나 관행은 그대로 계승되었고, 대체로 유교적 명분이 덧붙여져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경우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세자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원칙과 명분이 반드시 현실에서 관철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직계 왕자가 없어 태자(세자)의 책립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었다. 인종ㆍ명종ㆍ경종ㆍ헌종ㆍ철종의 예가 그러하였다. 인종ㆍ경종의 경우는 세제(世弟)를 책립해 왕위를 계승하게 했으나 명종ㆍ헌종ㆍ철종의 경우는 방계 왕족 중에서 대왕대비의 전교(傳敎)로 택정되었다. 이와 같이 세자를 결정하는 데에는 왕위계승자와의 친소 관계 또는 친인척 관계 등과 얽혀 중신들 간에 분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적장자 원칙에 따라 국왕의 자리에 오른 경우는 27명의 국왕 가운데 문종ㆍ단종ㆍ연산군ㆍ인종ㆍ현종ㆍ숙종ㆍ순종 등 7명에 불과하다.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위를 밟지 못한 세자의 경우도 7명이나 된다. 이러한 사실은 세자로서의 삶이 적지 않게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세자를 택하여 정하는 논의를 건저의(建儲議)라고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중신들이 왕자들 중에서 군도(君道)를 갖춘 이를 추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부왕의 뜻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태조 때 방석(芳碩)의 세자 책봉문제라든가 선조(宣祖) 때에 정철(鄭澈)의 건저(建儲) 문제라든가 숙종(肅宗) 때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소생 윤(浮)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 것은 그만큼 세자를 정하는 것이 왕조사회에서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를 미리 정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다음 차례의 국왕을 미리 정함으로써 국가의 지속성,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할 수가 있었다. 갑자기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현실의 국왕이 사라짐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불안과 혼란은 매우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미리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그만큼 미래의 혼란을 대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리 정한 국왕후계자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점도 매우 매력적인 장점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국왕이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자의성을 줄이기 위해 많은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성리학의 정치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국왕의 전제화(專制化)를 막고 정치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수 있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언관의 지위를 높이거나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직접 견제의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든지, 경연을 통해 국왕의 심성을 교육하고, 성인으로 만들려는 작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은 세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세자에 대한 정기적이고 장기적인 교육을 통해 세자를 아예 전제를 할 수 없는 훌륭한 임금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왕에게는 경연과 같은 의미를 지닌 서연(書筵)을 통해 구현되었다. 이러한 서연교육을 통해 궁극적으로 국왕을 성인(聖人)으로 만들고 그러한 성인 국왕을 통해 백성들을 위한다는 훌륭한 정치를 하게 한다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물론 세자는 일방적으로 양육과 훈육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다음 시대의 국왕이 되는 후계자로서 이에 걸맞는 여러 가지 장치가 세자를 둘러싸고 존재하였다. 동궁(東宮) 또는 세자궁(世子宮)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가지고 인원과 예산이 배정되었다. 특히 세자에게 중시된 것은 교육과 신변 보호였다. 동궁아관(東宮衙官)ㆍ동궁관 등으로 불려오다가 1392년(태조 1) 신정 관제 때 세자관속(世子官屬)으로 개칭된 이 기구가 바로 이러한 일을 맡았다. 이것은 뒤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분리되어 각각 교육과 신변 보호 일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세자는 다음 세대의 훌륭한 국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세자의 생활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의 후계자로서의 길을 성실하게 준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침 저녁으로는 부모인 국왕과 왕비를 비롯한 웃어른들에게 문안하고 아침부터 시작하는 서연의 조강, 주강, 석강 등을 이수해야 했으며, 또 저녁에도 문안인사를 드려야만 했다. 성인이 되는 것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에는 유교적 교양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가득하여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세자의 생활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단조로운 세자의 생활을 재현하는 것에서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세자로서 거쳐야 하는 공식적인 생활, 즉 관례ㆍ혼례ㆍ책례 등의 의례와 세자의 교육, 대리청정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보았다. 이러한 의례나 생활은 한 측면에서 보면 세자의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교육과 의례에 시간을 들일 수 밖에 없는 세자의 생활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측면에서 세자의 생활을 검토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