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왕실문화 인문강좌(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세자 - 세자의 대리청정
튼씩이
2022. 6. 27. 07:51
7. 세자의 대리청정
대리청정(代理聽政)은 국왕이 건강상의 이유로 통상적인 정사를 돌보기 어려울 때 차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또는 왕세손]가 국정을 대신하여 다스린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ʻ청정(聽政)ʼ으로 불리었으며, 때로는 ʻ대리(代理)ʼ로 약칭되기도 했다. 대리청정 시 왕세자 및 왕세손을 소조(小朝)라 하고, 국왕을 대조(大朝)라 했다. 이는 대체로 군권 및 인사 등은 국왕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으면서 대권을 행사하고 정사 실무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왕세자에게 허락된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대리청정의 기원을 《춘관통고》에서는 정종(定宗)년간 왕세자[태종]의 군국기무(軍國機務) 장악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향후 정착되는 대리청정기에 여전히 국왕이 군권 및 인사권을 장악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오히려 태종년간 국왕[태종]이 상왕(上王)이 되고 왕세자[세종]가 신왕(新王)이 된 후의 상황이 실제로는 대리청정에 더 가까웠다. 이는 형식상 신왕(新王)이 즉위했으나, 여전히 군권 및 대권을 상왕[태종]이 여전히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때의 권력구조가 향후 대리청정에 보다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광해군의 사례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으나 선조(宣祖)가 조정을 이끌고 있는 상황이어서 대리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조선왕조에서 실제 대리청정의 형식을 밟은 왕세자는 문종(文宗)이었다. 이는 태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실권을 모두 장악하여 정종이 명목상 군주였던 현상으로서, 세종이 즉위했으나 실제 태종이 군권을 고수하고 있던 상황들과는 전혀 다른 국면이었다. 문종은 세자로 있으면서 세종이 노환에 시달리자 세종 후반 정국을 대리의 명분으로 이끌었다. 세조(世祖) 만년에는 예종(睿宗)이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조선후기에 가서야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다. 조선전기 대리청정이 2회에 지니지 않았던 데는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장기간의 걸친 수렴청정이 다수 행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국왕 만년의 차기 계승권자에 대한 정사실습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반면에, 조선후기에는 국왕들이 세자들의 정사실습에 부단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숙종(肅宗)은 경종(景宗)에게 약 4년간을 맡겼으며,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약 9년간이나 대리청정을 행하였다. 정조(正祖)는 약 2년, 효명세자(孝明世子)도 약 4년에 걸쳐 청정(聽政)을 행하였다. 따라서 후기에는 경종의 대리청정이 가장 중요한 본보기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정유절목(丁酉節目)>은 향후 조선의 대리청정의 기준이 되었다. <정유절목>은 숙종이 경종의 대리청정을 앞두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했기에 국조(國朝) 및 중국의 고사(故事)를 널리 조사하도록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춘추관에서는 세종조의 실록을 직접 조사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 에서는 당나라의 전례를 고출하였고, 예조(禮曹)에서 중국의 전례들을 고찰하여 절목을 만들도록 했다. 이후 영조, 정조, 순조대를 거쳐 수차례 보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대리청정기에는 형식상 변화도 일어났다. 상왕(上王)이 될 경우에는 국왕보다 상왕의 격식을 높이는 것이 주요했으나, 대리청정기에는 현왕이 그대로 있으면서 세자로 하여금 섭정을 하도록 했기 때문에 세자의 예우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국왕에 버금가지만 그보다는 격식을 한 단계 내려서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현존하는 각종 규식들과 고문서들에서는 국왕과 구분이 되는 세자만의 독특한 격식이 존재하였다. 예컨대 휘지(徽旨), 영서(令書), 품령(稟令), 신본(申本), 신목(申目), 달사(達辭), 회달(回達), 상서(上書), 하답(下答), 외비(外備), 내엄(內嚴), 인접(引接) 등이 세자만을 위한 별도의 용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