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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공간, 동궁 (2) - 동궁의 위치와 구성
튼씩이
2022. 7. 11. 07:55
2. 동궁의 위치와 구성
개념적으로 동쪽에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더라도 그 위치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대 왕조의 궁궐에서는 동궁을 임금의 영역 동쪽에 조성하였다. 자금성 등 중국의 궁궐도 그러하고, 개경의 경우 『고려도경』에 ʻ동쪽 문에는 ʻ春德ʼ이라 편액했는데, 세자궁으로 통한다 ~ 좌춘궁은 회경전 동쪽 춘덕문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가 처음으로 책봉되면 세자라 하고, 관례 이후 여기에 거처했는데, 옥우의 제도는 왕궁만 못하다.ʼ라고 하여 세자궁이 명실상부하게 동쪽에 있는 동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궁 전각은 대체로 ʻ당堂ʼ호를 갖고 있다. 임금의 전각이 ʻ전殿ʼ으로 지칭되는 것과는 차등을 둔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임금의 전각은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으로 ʻ전호ʼ를 사용하였고, 왕세자의 공간은 자선당, 계조당 등으로 ʻ당호ʼ를 쓰거나 비현각 등의 이름을 가졌다.
(1) 경복궁 동궁
개국 초기 조선에서 동궁은 궁궐 밖 연화방에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에 왕세자의 혼례에 관한 의주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동궁이 궁궐 안에 있는 것이 합당하다는 판단에 의해 경복궁 내에 새로 동궁을 지은 것이 궐내 동궁의 시작이다. 이 때의 의례 정비는 비단 동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경복궁 전체의 유교의례 공간으로의 재정비와 관련된다. (김동욱, 2002)
경복궁의 동궁은 자선당, 승화당, 비현당(혹은 비현각), 계조당 등의 주요 전각과 춘방, 계방 등 부속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치는 근정전의 동편에 별도의 일곽을 담장과 행각으로 구분하여 조성하였다. 자선당은 세자의 서연과 회강의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혼전 등의 용도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세종의 혼전을 정할때로 후보에 올랐고, 세조,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 예종비 안순왕후의 혼전으로 활용되었던 바 있다. 승화당은 원래 임금의 공간이었다가 세종대에 세자가 섭행한 이후 세자의 서연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계조당에서 행하던 세자의 청정 의식을 승화당으로 옮기면서 동궁의 공간 사용방식이 개편되었는데, 계조당에서 조참을 받고 승화당에서 정사를 돌보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단종 즉위 이후 문종의 뜻에 따라 승화당과 계조당을 헐어버리면서 이들 전각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성종대에 다시 기록에 등장한 승화당은 중종대 이후 동궁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38년 화재로 사라졌다.
(2) 창덕궁-창경궁 동궁
창덕궁의 경우, 동궁은 성종대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세종 이후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창덕궁에 임어했던 임금으로서, 이 때에 이르러 창덕궁 동궁이 필요해진 것이다. 성종7년에 원자가 탄생하고 1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 이후 동궁의 건립을 명하여 최종적으로 성종18년에 동궁이 건립된 것이다. 이 때의 동궁은 건양문 바깥이라 한 것으로 보아 저승전 자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창덕궁 동궁은 경복궁과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나 원론적으로는 창덕궁 바깥에 위치한 것이었고 남향이 아닌 동향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 저승전은 명종 초년에 기록 인종의 혼전 설치를 위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다. 최종적으로는 이 전각이 협착하기 때문에 선정전으로 혼전을 정하였지만, 이 기록에서 저승전을 창덕궁의 동궁이라고 명시한 것으로 보아 저승전의 성격이 드러난다. 광해군때는 자전의 임시 거처로 활용되었는데, 이 때는 세자가 책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조대에는 왕대비의 처소로 사용된 바 있으나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시민당은 광해군대 이후로 세자와 관련된 기록이 상당히 많은 전각이다. 광해군3년에 시민당에서 세자의 동뢰연이 있었고 ʻ동궁 시민당ʼ이라고 명시된 기록도 있어서 이 전각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인조조에는 세조의 영정을 시민당에 봉안하기도 하여 임시적인 신위 봉안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세자 상견례, 관례의 장소로 사용되거나 임금의 접견, 친국, 신위 봉안 등의 용도가 기록에 등장한다. 경종은 자신이 세자시절에 사용하던 이 전각을 임금이 된 이후에도 종종 사용하였다. 정조 4년에 화재가 발생한 뒤 개축 논의가 있었으나 중건을 취소하였던 바 있다. 『동궐도』에도 빈 터로 묘사되어 있다.
중희당은 정조 6년에 지어진 대규모의 전각이다. 정조 8년 세자의 책례 기록이 있는데, 세자가 일찍 죽고 나서는 한동안 임금의 소견처로 사용된 바 있었다. 순조대에 세자의 대리청정 장소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가 헌종대에 들어 임금의 소대장소로 다시 성격이 변화하였다. 『동궐도형』에 ʻ금무ʼ로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