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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장식화, 언제 쓰였을까 – 의례
튼씩이
2022. 8. 9. 07:46
4. 궁중장식화, 언제 쓰였을까 – 의례
국가 오례와 궁중장식화의 사용
궁중장식화는 기본적으로 고정된 건축 공간에 설치하여 공간을 꾸미는 역할을 하였지만 때로는 특별한 의례를 위해 이동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이동이 가능한 병풍은 의례가 벌어지는 장소를 일상적 공간에서 의례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매체였다. 물론 종묘와 같이 제사 의례에 특화되거나 정전과 같이 대규모 연회나 군신 조회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도 있다. 그러나 궁중 내 궁궐은 대부분 평소에는 일상적인 업무와 휴식을 위한 거처이다가 특정한 경우에 의례의 무대가 된다. 병풍은 국가의 행사 때마다 그에 적합한 특별한 의례적 공간을 연출하였다.20)
조선의 국가 의례-즉 길례, 가례, 군례, 빈례, 흉례 모두에서 병풍은 의례적 환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1) 길례는 제향의례가 주를 이룬다. 종묘의 경우 고려시대와 조선 초에는 신주마다 부의, 즉 도끼 병풍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종묘 신실에 별도의 병풍은 놓여 있지 않게 되었다. 다만 제사를 준비하는 재청에는 <진설도>를 두어 제기의 위치와 의식의 순서를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오례 중 여러 의식에서 병풍의 수요가 많은 것은 가례였다. 혼례에는 의식 절차마다 모란병, 십장생, 소병 등 다양한 병풍이 사용되었으며, 연향에는 왕, 왕비, 세자, 세자비 등 주요 왕실 참석자의 자리마다 병풍이 설치되었다.
빈례에는 사행단을 위한 연향에서 국왕의 자리와 사행단의 자리에 병풍이 배설되었다. 군례에는 국왕의 야외 훈련시 지휘석에 오봉병이 설치되었다. 한편 군사 진법을 도해한 병풍이 있다. <영진총도> 가리개는 1787년 간행된 군사교범서인 『병학지남兵學指南』과 「영진총도營陣摠圖」를 도해한 것이다. 각 방위마다 2점의 2폭 가리개가 남면 우측부터 시계 방향으로 비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이 군사 회의에서 진법을 숙지하거나 지휘 공간을 장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흉례는 의식 절차에 따라 오봉병, 모란병, 소병풍이 엄중한 구분을 두고 설치되었다. 오봉병이 신주에 국왕의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모란병과 소병풍은 의례 공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모란병은 주로 신주가 머무는 모든 공간- 국왕의 생전 처소, 궁궐의 편전, 지방 관아나 길거리를 모두 엄숙한 장례 공간으로 장엄하였다. 소병풍은 시신을 가리거나, 신주가 놓이지 않은 그 밖의 제사 준비 공간을 엄숙하고 정결하게 유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궁중장식화는 다양한 소재를 통해 궁궐에 권위와 위엄을 부여하고 장수와 다복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병풍과 장지, 장벽화 등의 다양한 형식은 궁중 장식화가 독립된 회화 작품이 아니라 궁궐 공간에 맞게 설계된 실내 장식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한 소재와 형식의 장식화는 궁궐 전각 곳곳에 쓰임에 맞게 배치되어 그 공간의 의미를 더 강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한편 궁중 장식화는 국가에 의례가 있을 때마다 병풍을 이동 설치함으로써 일상적 공간을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의례적 공간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20) 이종숙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궁중 서화들을 의례용 장식화와 생활공간용 장식화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이종숙,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궁중장식화」, 『궁중서화I』(국립고궁박물관, 2012), p.364.
21) 왕실 의례와 병풍의 사용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이성미, 『왕실 혼례의 기록: 가례도감의궤와 미술사』(소와당, 2008); 「조선후기 진작·진찬 의례를 통해 본 궁중의 미술문화」,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2(민속원, 2005); 박은경, 「조선후기 왕실 가례용 병풍 연구」(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신한나, 앞의 논문; 명세나, 「조선시대 오봉병 연구: 흉례도감의궤 기록을 중심으로」(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7); 김수진, 앞의 논문(2017), pp. 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