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11, 망국 조선에서 한글을 구해내다
튼씩이
2023. 4. 17. 13:20
더욱 절실해진 한글보급
전번 이야기에서 지석영, 헐버트, 주시경이 지하에 묻혀있던 훈민정음을 살려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1894년 1월 동학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던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6월에는 청군이, 7월에는 일본군이 우리나라로 진군하여 결국 우리 국토를 놓고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다가 일본 무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동학 농민의 세력은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진압되었습니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조선은 500년 동안 섬겨오던 청나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가 유력해졌습니다. 이에 고종은 1896년 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일본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1898년 당시 23살이었던 한힌샘 주시경은 망국의 위험을 실감하고 서둘러 국문법을 정리하여 닥치는 대로 보급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한글맞춤법의 출현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까지 물리친 일본은 을사늑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한힌샘은 1906년에는 자신이 정리한 《대한 국어문법》의 목각본을 내고 학문적 축적을 거쳐 1910년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을 펴냈습니다. 이 해에 결국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어 총독부의 직영체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총독부는 1912년 한힌샘의 국어문법을 기본으로 하여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만들어 초등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게 됨으로써 나라는 망해 없어져도 한글은 살려내야 한다는 한힌샘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의 죽음(1914) 뒤 그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고 그 후신인 조선어학회가 3년 동안의 검토를 거쳐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공표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제의 통치가 한창일 때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쳐주고 한글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공표하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은 뜻밖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었다고 알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일까요?

▲ 1933년 조선어학회가 공표한 《한글맞춤법통일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