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울 도심 거리를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한글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한글로 표기한 간판은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심지어 최근 건설된 아파트 단지 내 시설명도 영어로만 표기돼 입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아파트가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영어를 쓰는 것이 도가 지나쳐 생활에 지장까지 준다는 지적이다.
출처=사회관계망서비스(트위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따르면 부산 ‘대연롯데캐슬레전드’ 단지 내 영어 사용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게시물에 함께 첨부된 사진에는 관리사무소가 ‘MANAGEMENT OFFICE’, 경로당이 ‘SENIOR CLUB’, 도서관이 ‘LIBRARY’로 표기돼 있다. 또 아파트 편의시설이 모인 건물은 ‘CASTILIAN CENTER’로 간판을 걸고 있다. ‘CASTILIAN’은 롯데캐슬에 사는 사람을 칭하는 조어다.
영어에 익숙지 못한 노년층은 제대로 시설을 찾아가지 못하는 등 불편을 겪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부산의 아파트만의 일이 아니다. 서울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60대 중반 여성은 “아파트 내 영어로 된 건물이 어떤 곳인지 몰라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차라리 간판 그림이 있는 곳이면 낫다.”며 “한글로 써주면 좋겠다. 모른다는 것이 창피해서 누구에게 묻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최근의 다른 신축 단지들도 영어로만 시설 전부를 표기하는 경우는 잘 없으나 경로당을 ‘시니어스클럽’으로 음독해서 한글로 표기하거나 편의시설을 ‘COMMUNITY CENTER’로 적는 등 영어 사용이 많다. 간판이나 메뉴 모두 ‘안내’나 ‘정보 전달‘이 목적인데도 영어 표기가 많아지는 이유는 한글보다 영어가 세련됐다는 사회적인 인식이다. 꼭 아파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영어가 차용되는게 현실이다.
2017년 옥외광고물에 한글을 병기하도록 하는 강제 조항을 마련해달라는 청원도 등장했지만 법제화되지는 못했다. 지난해 1월 한국공간디자인학회가 한글 간판 디자인 선호도 연구를 위해 35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카페·이동통신사·베이커리 등 9개 브랜드의 한글 간판과 영문 간판을 함께 보여주고 정서적 주의도(매력), 조형적 호감도(친밀), 이지적 선호도(조화) 평가를 물었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영문이 한글보다 전체적인 선호도는 높게 나타났으나 대부분 항목에서 0.5점(5점 만점 기준) 수준의 차이를 보였다. 실제로는 선호도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본래 목적을 잃고 지나치게 디자인에만 의존한 나머지, 어르신 등 특정 계층에게 장벽을 높인다는 점이다.
지자체 대부분에서 상표법이나 디자인 보호법에 따라 등록된 상표는 한글과 같이 쓰지 않아도 된다고 조례로 안내하고 있어서 한글 없는 간판은 사실상 묵인되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 불어 등 외래어를 쓰거나 지나치게 복잡한 합성어가 많아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바뀌려는 움직임은 지지부진이다. 외국어 표기가 고급스러운 것, 멋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이어진다면 한국어는 의사소통의 기능을 잃고 결국에는 언어의 자격까지 잃게 될 것이다. 정작 아름다운 우리말은 점점 우리 생활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도한 외국어 표기가 소외계층을 발생시키고 반감을 키운다면 누구를 위한 선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정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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