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은 푸르스름하고 탁한 은백색의 금속 원소다. 주기율표의 82번째 원소며 원소기호는 Pb다. ‘무른 금속’을 뜻하는 라틴어 ‘Plumbum’에서 따왔다. 납은 가공하기 쉬워서 일찍부터 수도관 또는 배관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납을 뜻하는 한자어 연(鉛)은 쇠(金)와 늪(㕣)을 합친 것으로 역시 비슷한 의미가 있다.
기원전 6,500년 무렵 인류가 사용하기 시작한 납은 다양한 광물에서 추출할 수 있어서 구하기가 쉽다. 또한 견고하면서도 무른 특성이 있어서 가공하기가 쉽다. 녹는점이 섭씨 327도로서 대부분의 다른 금속보다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
로마제국에서는 상수도관, 식기, 거울, 동전, 심지어는 화장품까지 납을 써서 만들었다. 현대의 산업 현장에서도 납은 활용도가 높다. 납은 축전지, 납땜, 탄약, 페인트, 낚시 추, 크리스탈 유리잔, 인쇄 활자 등에도 쓰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0년 무렵에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성서를 찍어낼 수 있게 되자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인쇄된 책을 통하여 지식이 대중에게까지 전파되자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이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납은 과거부터 그 독성이 알려져 있었다. 동의보감에서는 납 종류의 약재로 연(鉛), 흑연(黑鉛), 연단(鉛丹)(일명 광명단), 밀타승(密陀僧)(일산화납을 말함)이라 하여 피부병이나 구충약 등에 쓰이는 약재 가운데 하나로 적어 놓았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납의 독성을 알고 있었다. "독성이 있으니 용량을 잘 지키고 오래 먹지 말며 허약자는 복용하지 말라"고 써 놓았다. 지금은 먹는 약으로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
납이 인체에 들어오게 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 두통, 현기증, 우울증은 물론 복부 경련, 소화 불량, 복통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말초신경을 침범해 정신착란과 시력 저하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납 오염이 뇌를 손상하면 정신이상을 일으켜 발작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황당한 얘기로 들리지만, 로마는 납 오염으로 멸망했다는 가설이 있다. 캐나다의 누리아그라는 지리화학자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지배자 가운데는 납중독의 만성 증세인 통풍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는 로마인들이 납으로 만든 식기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인 설치했던 상수도관의 주원료는 납이었다. 네로를 위시한 로마의 황제 가운데 성격이상자가 많았던 것도 역시 납중독 때문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가설은 로마인의 유골에서 납 농도가 정상치보다 훨씬 높게 검출된다는 실증적 연구로 뒷받침되고 있다. 로마제국의 붕괴에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겠지만, 지배계층 사이에 광범위하게 번진 납중독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누리아그 박사는 추정했다.
이야기를 달리하여 석유를 정제하여 나오는 휘발유는 1885년에 독일에서 자동차의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초기에 휘발유는 엔진에 들어가 '노킹'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노킹은 엔진에서 점화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 '이상 연소'를 뜻한다. 이때 나는 소리가 마치 문을 노크하는 것 같다고 해서 노킹이란 이름이 붙었다. 미국의 토마스 미즐리가 1923년에 납 성분인 테트라에틸납을 휘발유에 첨가하면서 노킹 현상을 해결하였다. 유연(有鉛)휘발유는 납 성분이 들어있는 휘발유를 말하는데, 1990년대까지 70년 이상 전 세계의 승용차에 사용되었다.
미국의 클레어 페터슨은 1956년에 운석에 함유된 납의 양을 정확히 측정하여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임을 밝힌 지질화학자였다. 그 후 그는 지구의 대기나 물, 흙 속에 존재하는 납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다양한 환경 표본에서 납 함량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 중의 납이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나올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해마다 두껍게 쌓이는 그린랜드 얼음층에 구멍을 뚫어 얼음을 분석하면 그 해 대기 중의 납 농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사 결과 대기 중에 1923년 이전에는 납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는데, 유연휘발유가 등장하면서 납의 농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963년에 학술지 《네이쳐》에 발표하였다.
▲ 인류를 납중독 위험에서 구한 클레어 페터슨(1922~1995)
납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페터슨은 휘발유에 납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막강한 돈과 권력을 가진 정유 산업은 청부 과학자를 동원하여 그의 연구를 비판했다. 연구 자금으로 회유하기도 하고 연구를 중단하도록 정부와 대학 당국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터슨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의 연구 덕분에 미국에서 1970년에 대기청정법이 제정되고, 유연휘발유를 대체할 수 있는 무연휘발유가 개발되었다. 우리나라는 1993년에 유연휘발유 판매를 금지하였다. 1995년 미국에서 유연휘발유 판매가 완전히 금지되었다. 2021년 알제리가 마지막으로 사용과 판매를 금지하면서 유연휘발유는 10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연휘발유 사용 중단은 20세기 공중보건의 큰 성취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2011년 연구에 따르면, 유연휘발유 금지 조치는 세계적으로 연간 100만 명의 사망, 특히 어린이 12만 5,000명의 사망을 예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미국 듀크 대학 연구진은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하였다. 연구진은 어린이 혈중 납 농도, 유연휘발유 사용량, 인구통계 센서스 등 공개된 데이터를 활용하여 2015년 기준 납에 대한 노출이 뇌의 인지능력인 IQ에 미친 영향을 조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절반이 넘는 1억 7천만 명이 어린 시절 의학적으로 위험한 수준의 납에 노출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유연휘발유가 가장 많이 쓰인 1960~1970년대 태어난 사람들은 납의 해로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납으로 인해 미국 인구 전체의 IQ는 약 8억 2천400만 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1인당 평균 3점 가까이 IQ가 낮아진 셈이다. 특히 1960년대 중후반 태어난 사람은 최대 6점의 IQ 손해를 봤을 것으로 연구진은 추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약 1,200만 종의 화학물질이 존재하는데 해마다 약 2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시장에 나오고 있다고 한다. 유연휘발유로 인한 납 오염은 처음에는 환영받으며 등장한 화학물질이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 인지능력에까지 피해를 주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현재는 위험하지 않더라도 환경오염이 장기적으로 누적되면 어떠한 피해가 나타날지는 계속된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나 후쿠시마의 방사능 오염수 배출이 지금 현재는 위험하지 않더라도 50년 또는 100년 지나서도 인간과 생태계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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