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병장행가
- 이광수(가야마 미츠로)
만세 불러 그대를 보내는 이날
임금님의 군사로 떠나가는 길
우리나라 일본을 지키랍시는
황송합신 뜻받어 가는 지원병
▲ 1940년 매일신보에 실린 이광수의 창씨개명을 권고하는 논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하면 ‘191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로 표현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광수는 〈무정〉을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126회에 걸쳐 연재하여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다음 해 1918년 단행본으로 펴내 1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 그의 인기는 단연 으뜸이었고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으로 꼽혔다.
그 뒤 농촌 계몽소설로 꼽히는 〈흙〉을 쓰고, 남녀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 〈유정〉(1933), 〈그 여자의 일생〉(1934~35), 〈사랑〉(1938)과 함께 역사소설 〈단종애사〉(1928~29), 〈이순신〉(1931~32), 〈이차돈의 사〉(1935~36), 〈공민왕〉(1937) 등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하고, 이어 임시정부에서 펴낸 한일관계 사료집 주필이 되어 편찬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 하였다.
하지만, 그는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변절하여 '복지황군위문'에 협력하는 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했으며,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시작한 날인 1940년 2월 11일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 가야마 미츠로)’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치고, 학병 권유차 도쿄에 다녀올 정도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 이광수의 친일행위는 시 <지원병장행가>에서 “ 우리나라 일본을 지키랍시는 / 황송합신 뜻받어 가는 지원병”이라고 노래하는 등 그 정도가 확연히 드러났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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