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1919년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국경일로

튼씩이 2024. 8. 21. 09:22

제79돌 광복절 행사가 정부 주최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주최 기념식으로 각각 열린 것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친일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반대하면서 따로 기념식을 단행했다. 윤석열 정부는 최근 말썽이 된 건국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광복회는 논평을 통해 “1948년 이승만의 건국절 주장은 선열들의 피로 쓴 독립운동의 역사를 혀로 덮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 독립을 기뻐하는 사람들 (1945. 8. 16) 출처: 국가기록원

 

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세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첫째,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후유증일 것이다. 1948년 9월에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이승만의 방해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법에 따라 특별재판소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형 1명을 포함하여 12명밖에 안 되었다. 그마저도 실제 사형 집행은 1명도 없었고, 대부분 감형이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26,529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청 재판에 가장 먼저 끌려 나온 피고들은 나치 협력 언론인들이었다. 드골 대통령은 언론인을 제일 먼저 숙청한 것에 대해 《전쟁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 밖에도 폴란드는 6,000명의 부역자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약 200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154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39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국은 일본군에 협력한 왕자오밍(王兆銘) 국민 정부에서 요직을 맡거나 일본군에게 부역한 자들을 한간(漢奸)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였는데, 사형이 14명, 무기징역이 24명, 유기징역이 265명이었다.

 

한국입법학회 회장을 역임한 정철승 변호사의 조사에 따르면, 민족을 배반한 부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재판소 등 특별기관을 설치한 나라는 모두 22개국이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북한, 필리핀 등 5개국이고, 유럽에서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델란드, 벨기에, 덴마크, 루마니아, 불가리아, 노르웨이, 그리스,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에스토니아, 소련 등 17개 나라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부역자를 단 한 명도 단죄하지 못한 부끄러운 국가라고 한다.

 

둘째, 이러한 국론 분열의 밑바탕에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영향으로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이승만(1875~1965)은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에 뽑혔지만, 상해에 가지 않은 것은 물론, 여러 갈등으로 임시정부로부터 결국 탄핵당하고 말았다.

 

또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지내면서 장기 집권을 추구하여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 잇따른 4.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하여 생애를 마쳤다.

 

▲ 1921년(대한민국 3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ㆍ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이승만의 정치적 업적은 아직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나는 이러한 논란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다른 나라 건국의 아버지들과 비교해 보았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1893~1976)은 중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 이겼고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마오쩌둥은 장기 집권하는 동안(재임기간: 1949~1976) 유교를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자유연애를 인정하는 등 건국의 아버지로서 공을 세웠다. 마오쩌둥은 그러나 문화대혁명(1966~1976)이라는 잘못을 저질렀다. 마오쩌둥의 공과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지금까지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서 존경받고 있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1890~1969)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프랑스, 일본과 싸워 승리한 뒤 1954년 독립을 쟁취하여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국가주석으로 취임하였다. 그 뒤 남북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북베트남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미국과 싸우다가 이념으로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에 죽었다. 평생 베트남의 자주독립이라는 목표를 추구한 호치민은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뒤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호치민은 지금까지도 베트남 국민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투르키예(옛 터어키) 독립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하였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선포되고 아타튀르크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재임 15년 동안 엄격한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남녀평등을 이루었으며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아타튀르크는 지금까지 전 국민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데,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투르키예의 모든 지폐와 동전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잘 알려졌듯이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논란이 많으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는 한강다리 폭파, 사사오입개헌, 양민 학살 등 과(過)가 많았던 인물이다.

 

셋째,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확증편향(確證偏向)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 또는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말이다.

 

흔히 하는 말로서, “내 주변에는 xx당을 지지하는 사람밖에 없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확증편향의 좋은 예이다. 당신은 당신의 정치 성향과 완전 반대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가 있겠는가? 아니면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겠는가? 특히 우리는 사람을 사귈 때 정치 성향이 반대라면 은연중에 그 사람을 멀리할 것이다.

 

확증편향을 증폭시키는 것은 언론이다. 어떤 사람이 정보를 얻기 위하여 조ㆍ중ㆍ동 만을 보고 듣는다면, 그 사람이 한겨례, 경향, 오마이뉴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정치적인 주제로 토론하여 결론을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과 기독교 장로가 성경 구절을 주제로 토론하여 결론을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정치와 종교에 관해서는 토론하지 말라는 금기 사항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결론을 말할 수가 없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양비론이나 양시론은 무책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한 가지 역사적인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동북부 13개 식민지 대표 56명이 모여 서명하고 선언한 미국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발표되었다. 독립이 선언되었지만, 실제로 독립이 된 것은 아니고, 영국군을 상대로 독립전쟁이 계속되다가 1783년 파리조약에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어서 미국헌법이 1787년에 제정되고 조지 워싱턴이 1789년 4월 30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실제 독립한 날이 아니라 독립선언을 한 7월 4일이며 가장 큰 국경일로서 미국 국민의 축하를 받고 있다.

 

그것처럼 임시정부 수립은 대한민국이 세워진 날이다. 그런데도 광복 3년 뒤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공교롭게도 날짜는 같지만,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광복된 날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육지책으로 필자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국경일로 격상시켜서 광복절과 대등하게 경축하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