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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극복하는 법 - 박광일

튼씩이 2018. 11. 12. 15:50

답사를 자주 다니다 보면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한 장소가 갖는 시간의 깊이 때문이다. 우리가 찾는 역사 유적은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있다. 또 실제로는 대표 이미지 외에 다른(어쩌면 더 중요한) 내용을 품고 있을 때도 있다. 설명 여하에 따라 자칫 편향되거나 누락될 가능성이 있으니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특별한 지식 없이 경복궁을 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때 을미사변(1895년)이나 일제 강점기의 궁궐 파괴만 설명할 경우 누군가는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세종의 치세(세상을 잘 다스림)나 궁궐 조영(집 등을 지음)에 담긴 역사적, 철학적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한 채 한쪽으로만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역사공부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역사 유적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한 시점의 이미지가 전체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조금 시선을 달리해서 기억하기 싫은, 아니 치욕스러운 역사가 담긴 유적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한때는 잊는 것이 낫다고 했지만 요즘은 이러한 역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타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곳을 돌아보고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이라고 해서 그런 장소도 남겨 놓는 경우가 많다. 폴란드의 '오시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우리나라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같은 곳이 그렇다. 그러나 눈에 뜨지 않아서, 또는 개발 흐름에 묻혀서 그런 안타까운 역사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유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스럽게도 선례를 찾을 만한 장소가 있다. 바로 '효창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 시대 왕실 무덤인 '효창원'이었다. 다섯 살에 요절한 정도의 큰 아들 문효 세자와 그의 생모 의빈 성씨 등 몇 사람의 무덤이다. 정조는 세상을 떠난 아들을 한강 건너로 보내기 싫어 이 장소를 골랐고 또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숲도 울창하고 왕실 묘역의 장엄함도 갖추었다. 그런 곳을 망가뜨린 건 일본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과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은 효창원 인근에 주둔했다. 그러더니 남산과 용산 일대를 일본군, 일본인 거주지로 만들었다. 급기야 일제 강점기가 되자 효창원의 울창한 숲을 헐어 공원과 골프장을 만들고 왕실 무덤들은 서삼릉으로 옮겨 버렸다. '효창원'은 사라지고 '효창 공원'이 된 것이다.


이 공간에 다시 의미를 부여한 이가 바로 김구 선생이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세 분 모두 일본에 끌려가 순국했다. 김구 선생이 박열 선생에게 유해 송환을 부탁했다.) 고국으로 옮겨 국민장을 지낸 것이다. 중국에서 순국한 임시 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무덤도 이곳에 만들었다. 또 김구 선생도 여기에 묻혔다. 자연스럽게 효창 공원은 일제가 만든 공원이 아닌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민족의 성지가 된 것이다. 어쩌면 김구 선생은 일제가 더럽힌 공간을 독립운동가의 기운으로 누르고자 한 건 아닐까.


아쉽게도 현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효창 공원엔 운동장도 생기고 동상과 기념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김구 선생의 뜻을 살릴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물론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며, 그렇게 될 경우 새로운 역사 한 줄이 멋지게 더해질 것이다.


김구 선생의 뜻은 임시 정부의 방침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고자 임시 정부 때 정한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1905년)을 맺은 날이다. 또 비록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바람에 이루지 못햇지만 임시 정부가 광복군으로 하여금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한 날도 8월 29일, 경술국치(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일)의 날이다. 이렇게 과거를 잊지 않고 새롭게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다.


박광일 / 역사 여행 전문가, 여행이야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