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는 먼 것은 잘 보고 가까운 것은 잘 보지 못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또 그런 사람이 쓰는 안경을 말한다. 멀리보기, 원시(遠視)와 같은 말이다. 눈의 굴절 이상으로 물체가 바로 보이지 않는 난시(亂視)는 어릿보기라고 한다. 돋보기와 반대로 가까운 것은 잘 보고 먼 것은 잘 보지 못하는 일,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쓰는 안경은 졸보기라고 한다. 바투보기, 근시(近視)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안경을 쓴 대부분의 젊은 사람은 졸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시력이 좋아서 안경을 안 쓰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도수가 없는 안경을 맞보기라고 한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돋보기와 졸보기가 사람을 뜻하기도 하므로 도수 없는 안경을 쓴 사람, 그러니까 안경을 안 써도 되는 사람을 맞보기라고 해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당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경을 쓰고 안 쓰고에 따라, 또는 쓰고 있는 안경의 종류에 따라 당을 만든다고 하면 어느 쪽이 가장 유리할까. 국민 전체로 보자면 맞보기가 많겠지만, 유권자 층만으로 따져 보면 아무래도 졸보기 당이 당원을 확보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쉽다. 그렇게 되면 요즘에는 졸보기들이 레이저 수술로 시력을 회복해 안경을 벗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데, 맞보기 당이 당세를 늘리기 위해 이 수술의 보급에 발 벗고 나서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돋보기와 졸보기는 각각 ‘돋다’와 ‘졸다’에서 나온 말이다. ‘돋다’는 해가 돋는다, 새싹이 돋는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말이다. 물론 때로는 여드름이나 종기, 두드러기 같은 것이 돋아서 속을 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졸다’는 ‘줄다’의 작은말로, ‘찌그러지다’와 통하는 말, 다시 말해 싹수가 안 보이는 말로 보면 된다. 그래서 진화(進化)는 우리말로 돋되기, 퇴화(退化)는 졸되기라고 하는 것이다.
돋보기 (명) 작은 것을 크게 보이도록 알의 배를 볼록하게 만든 안경. 흔히 노인들이 쓴다.
쓰임의 예 – 두식 영감은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집어 들었다. (황순원의 소설 『신들의 주사위』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어릿보기 – 눈의 굴절 이상으로 물체가 바로 보이지 않는 난시(亂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