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100년 전 우리말 풍경 -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얼마나 아는가?

튼씩이 2021. 11. 13. 08:58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얼마나 아는가?” 이는 1932년 5월 1일에 발행된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제1권 제2호에 실린 외솔 최현배의 글 제목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글에서 외솔은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제대로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모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그 나라의 말을 다 아는 것이 아님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당시의 조선 청년들은 조선말은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여 더 알려고 하지 않고 외국어 공부에만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 <그림 1>『한글』제1권 제2호(1932. 5. 1.) 목차

 

 

 

외솔은 그 단적인 예로 그해 봄에 최초로 치러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 조선어 과목의 채점 결과를 제시하였다. 지원자 중 80점 이상이 단 한 명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후하게 주어서 60점이 겨우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어 과목이 전문학교 입학시험에 포함된 것은 1932년 연희전문학교가 최초였다. 외솔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지원자들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도 전문학교에 진학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조선 사람에게 왜 조선말 시험을 치르게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서를 고려하여 외솔은 입학시험 결과를 통해 모국어라 해도 단어나 문장의 뜻과 쓰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함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의 전신

 

 

▲ <그림 2> 1932년 2월 10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연희전문학교 입학 시험 과목:
‘문과’ 시험 과목 중 ‘조선어’가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60점대의 점수를 받았다는 연희전문학교 제1회 조선어 입학시험은 총 네 개의 문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번 문항은 단어의 뜻을 해석하고 그 단어를 사용해 예문을 만드는 문제, 2번 문항은 속담의 뜻을 해석하는 문제, 3번 문항은 『초원(草原)의 정적(靜寂)』이라는 제목의 시조를 해석하는 문제, 4번 문항은 작문 문제였다. 지원자들이 특히 어려워했던 문제는 1번과 2번으로, 아예 점수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먼저 1번 문항을 살펴보자.

 

 

 

 

1번 문항의 오답 중 특히 두드러진 것은 ‘시름없다’를 ‘걱정 없다’로 풀이한 것이나 ‘짐짓’을 ‘진작’의 뜻으로 풀이한 것, 그리고 ‘여간’을 ‘매우’의 뜻으로 풀이한 것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풀이된 각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2번 문항으로 출제된 속담은 다음과 같았다.

 

 

 

 

속담 풀이 문항의 경우 표면의 뜻과 이면의 뜻을 모두 기술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해당 문장의 관용적 용법을 파악하고 있어야 답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②의 ‘시앗’은 남편의 첩을 뜻하는 말인데 이 속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의 뜻만이 아니라 시앗과의 싸움에서 흔히 정을 떼기 위해 요강을 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요강 장수가 이득을 본다는 맥락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타난 각 속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연희전문학교에서 문과 입시 과목에 조선어를 포함시키기 전까지 오늘날의 대학에 대응되는 고급 학교의 문과 입학생들은 영어, 일본어 및 한문, 역사(서양사, 일본사), 수학 과목 시험을 치렀다. 192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 어문의 장래를 위해서는 고급 학교의 입시 과목에 조선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1932년에야 조선어가 사립 전문학교의 입시 과목으로 채택된 것이다.

 


외솔은 최초로 치러진 조선어 과목 입학 시험에 대한 채점 소감을 밝히며 ‘우리 말의 말광’ 즉 국어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입학시험을 통해 중등 교육을 받은 조선 청년들의 조선말 지식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처럼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조선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어사전의 편찬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외솔은 시험 문항을 통해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 시험의 네 번째 문항은 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조선어 과목이 있음을 보고 느낀 생각을 서술하는 논술 문제였다. 1~3번 문항의 답안을 작성하며 골머리를 앓았을 지원자들에게 스스로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출제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글: 안예리(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