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한글 위인 열전 - 세종대왕과 정의 공주

튼씩이 2022. 5. 30. 07:53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걸작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단독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쓰여 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번역하고 해설서를 만드는 등의 작업에 참여한 것도 모두 훈민정음 창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한글을 만든 것일까?

 

베일에 감춰진 한글 창제의 비밀과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죽산 안씨 일가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 공주는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했는데, 공주의 시댁인 안씨 족보에 정의 공주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이 기록은 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한쪽에서는 이 기록을 한글 창제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로 보기도 한다.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을 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던 중 변음과 토착에 문제를 느끼고 이것을 아들인 대군들에게 연구 과제로 내린다. 그런데 대군들 중 문제를 풀어내는 사람이 없자 세종은 시집간 딸 정의 공주에게 문제를 내려보냈다. 정의 공주는 금세 문제를 풀어 바쳤고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며 노비 수백 구를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다. 세종이 쉽게 풀어내지 못했던 문제, 아들과 딸에게 지혜를 구해야 했던 ‘변음과 토착’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변음과 토착의 문제

 

기록 속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무엇인가에 대해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한자 자체의 뜻에 기인하여 ‘변음’을 ‘소리의 변화 원리’로 보고 ‘토착’을 ‘소리를 토하는 원리’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학자는 ‘변음’을 정음과 반대되는 말인 사투리로, ‘토착’은 ‘단군 때의 가림토1)’라고 본다. 정의 공주 논의와 관련해 정식 학술 논문을 발표한 이가원 교수는 ‘변음과 토착’을 말 자체를 풀이하는 것으로 접근했다. 즉, ‘변음’은 소리가 바뀜에 따른 문자 제정이나 변동의 문제이고, ‘토착’은 조사나 어미가 붙으면서 생기는 음의 변화나 그에 따른 문자 표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는 김슬옹 교수는 이가원 교수가 말하는 ‘변음과 토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었다. ‘몸’이라는 단어에서 첫소리 ‘ㅁ’과 끝소리 ‘ㅁ’의 발음이 다른데 이것을 같은 문자로 만들 것인지, 또 ‘몸’에 조사 ‘이’가 붙으면 [모미]로 발음되는데 이처럼 끝소리가 다시 첫소리로 오는 현상을 어떻게 반영하여 문자를 만들 것인지 등이 ‘변음과 토착’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음과 토착’이 어떤 문제였는지 명확하게 밝히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의 공주의 재능

 

 

≪죽산안씨대동보≫에서는 정의 공주가 대군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고 하는데, 정의 공주는 어떤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 졸기(拙記, 고인에 대해 약술한 기록)를 보면, 과연 정의 공주가 재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을 해득했다고 한다. ‘역산’은 ‘천문학과 수학’을 뜻하는데, 역산을 해득했다는 것은 천문학과 수학에 능했다는 말이다. 세종 역시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 예로 세종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조선에 맞는 일월식을 계산해 새로운 역법과 ‘일성정시의’라는 시계를 만들었으며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간의’, ‘혼천의’ 등을 만들어 당대의 천문학 진흥에 힘썼다. 또한 세종은 수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서 대군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신하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 수학을 배워오도록 했으며, 본인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고난도 수학서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을 배웠다.

 

졸기에도 나오듯, 세종은 자신을 쏙 빼닮은 정의 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로 세종은 정의 공주가 시집 간 후에도 궐 근처에 살도록 했고, 부마(사위)인 안맹담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안맹담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염려해 세종이 친히 안맹담의 친구들을 불러 “누가 안맹담과 술을 마시는가?”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만약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정의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이지적인 인물로서 자신에게 애틋했던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죽산안씨대동보≫의 신빙성

 

≪죽산안씨대동보≫를 정설로 보지 않는 학자들은 이 기록이 한 집안의 족보라는 점을 들어 ‘실록’ 수준의 신빙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 왕조의 역사를 일관되게 춘추필법2)정신으로 서술한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선왕인 태종의 실록을 보려다가 두 번이나 실패한 일이라거나 연산군 때 사관들이 사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참극(무오사화)이 발생한 일 등은 실록의 엄정성을 입증하는 예이다. 조선 27대 임금 실록 가운데 일제의 압력이 작용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 포함하지 않는 것도 왜곡되지 않은 역사 기록물을 후대에 남기려는 춘추필법의 정신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조차도 이러할진대 일가의 족보 속 내용이 정설로 인정받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을 단순한 야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있다. 김슬옹 교수는 족보 또한 정사 못지않게 믿을 수 있는 역사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족보를 다루는 학문을 ‘보학’이라고 하는데, 사실 보학도 정사 못지않은 엄격함이 있습니다. 집안의 ‘혈통’을 다루는 데 결코 허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순 야사라 치부하기에는 (정의 공주) 기록이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비 수백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상이 얼마나 컸는지 그 규모에 대해서는 가문을 자랑하기 위해 살을 조금 붙일 수는 있을지언정, ‘변음과 토착의 문제를 풀어’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점은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므로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E.O. Reischauer)와 페어뱅크(J.K. Fairbank) 교수는 그들의 공동 저서 ≪한글의 전반적 재검토(Global Reviews of Hangeul)≫에서 “한글은 아마도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체계일 것이다.”라고 평가했고,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자신의 저서 ≪문자 체계(Writing Systems)≫에서 “한글은 의문의 여지없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적 산물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라고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극찬했다. 세계의 유명 언어학자들이 인정할 만큼 우수한 한글이기에,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지에 대한 궁금증은 세월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죽산안씨대동보≫라는 일가의 족보 속 내용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1) 기원전 22세기에 고조선을 세운 단군이 만든 문자인 것으로 전해진다.

2) 중국의 경서 ≪춘추≫에서 공자가 비판적인 태도로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한 필법을 뜻한다.

 
 

※ 참고문헌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8. ※ 내용 자문
김슬옹(세종나신곳성역화국민위원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