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한국어 교육, 그리고 우리 -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

튼씩이 2022. 6. 11. 13:44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어떻게 할 것인가? 훅 돌아보며 상대를 확인하는데, 그 사람이 그냥 간다. ‘괜찮은가 보다’라고 재빨리 판단하며 나도 그냥 간다. 장면을 하나 더 생각해 보자. 친구와 약속한 곳으로 가고 있는데, 길이 많이 막힌다. 나의 계획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국 늦어버렸다. 저기쯤 나를 기다리는 친구가 보인다. 뭐라고 말을 할까? ‘많이 기다렸지? 추웠겠다…’라며 우선 친구를 달랜다. 마지막에는 음식값도 계산하며 늦은 값을 치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드라마 같은 장면 두 개를 봤다. 이렇게 미안할 일이 생겼을 때 한국인들은 보통 뭐라고 하는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이 생겼을 때는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배운다. 그런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아는 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다. 한국인의 사과 방식이 그러하다. 옆 사람과 부딪치고서도 괜찮은지 살펴보고 있는 것이나, 약속에 늦으면 위로하면서 밥을 사는 한국인의 대처 방식을 한번 곱씹어 보자.

 

 

한국어 교실에서 학습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사례 중에는 한국인의 사과 표현에 대한 불평이 많다. 한국인은 사과했다고 하고, 외국인은 사과하지 않았다고 하는 어중간한 상황들이 그것이다. 한쪽은 사과의 낯빛을 보냈고 여러 방법으로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다른 한쪽은 이를 사과로 보지 않으니 답답할 일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과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사과하지 않았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사과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사과문은 기본적으로 ‘무엇에 대하여 무엇을’ 또는 ‘누구에게 무엇을 했음을’로 이루어진다. 사과는 잘못을 말하고 미안하다며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를 하는 사람은 사과하는 사람이 아닌 상대방이다. ‘정중하게 사과하다, 거듭 사과하다’와 같이, 사과는 정중해야 하고 때로는 거듭해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사과를 잘하고 있을까? 한국어 교재의 대화문에서 사과하는 상황을 찾아보았는데 몇 가지 특징이 보였다. 우선, 제대로 사과하는 모습이다. 다음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업무 공간의 윗사람에게는 사과의 뜻에 맞는 사과를 하는 것이 보인다.

 

 

가: 과장님. 죄송합니다. 보고서를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나: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왜 아직 다 못 했어요?
가: 제가 좀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퇴근 전까지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다음부터는 기한을 꼭 지키도록 하세요.
가: 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출처: 《바로 말하는 한국어》

 

 

한편, 사과인지 변명인지 혹은 위로인지를 알 수 없는 표현들도 많다. 특히 사적인 관계에서 건네는 사과에서는 미안함을 대신할 독특한 표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정말 많이 기다렸지요? 길이 너무 막혀서 늦었어요.’와 같은 예가 그것이다. 간혹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뒤따르는 변명이 훨씬 길 때도 많다. ‘미안해요. 전화하려고 했는데 휴대 전화 배터리가 없었어요. 시청 앞에 행사가 있어서 차가 꼼짝도 안 했어요.’와 같은 예시가 확인된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을 보상으로 대신 표현한다. ‘정말 미안해. 대신 내가 맛있는 저녁 사 줄 테니까 그만 화 풀어.’와 같이 말한다.

 

 

한국인의 사과는 왜 저렇게 구구절절하냐는 한국어 학습자의 말에, 한국인으로서 그 까닭을 짚어 본다. 일의 연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억울함, 자신의 고의가 아니라는 마음, 사과하는 쪽이 일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회 분위기 등 그 내면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환경 탓을 주로 하고, 심지어 상대의 지난 잘못을 들추어 자신의 잘못을 상쇄하려는 모습도 왕왕 보인다. 사실 ‘사과에 인색한 한국인’이라는 점을 한국인도 잘 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직접적인 사과의 말을 여러 언행으로 대신하는 것, 이 또한 우리의 언어문화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교육을 하는 우리는 ‘가르쳐야 할 사과의 언행’을 어느 정도 정해야 한다. 그간 한국어 교재에서 사과의 영역이 모호하지 않았는가? 우리 언어생활에서 사과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한국의 이런 문화가 반영된 표현이 언어 모방의 준거가 될 교재에 실리는 것은 정당할까? 한국어교육이 한국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데, 국외 현지의 한국어 학습자가 그 문화권에 맞는 사과 표현을 요구한다면 어느 정도로 맞추어 가르쳐야 할 것인가? 오늘도 한국어교육을 위한 숙제를 한 아름 받아들고 나선다.

 

 

 이미향(영남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