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맛의 말, 말의 맛 - 잡스러운 곡식의신분 상승

튼씩이 2022. 11. 28. 12:56

‘혼분식’이란 말이 널리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무언가를 섞어 먹는다는 ‘혼식(混食)’과 가루를 먹는다는 ‘분식(粉食)’이 합쳐진 말이다. 쌀이 귀하던 1970년대 후반까지 장려 운동을 벌이며 널리 쓰이던 말이다. 무엇을 섞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가루는 또 무엇인가? 쌀과 같이 밥을 지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섞는’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잡곡’을 뜻한다. 또한 곱게 빻아 낸 모든 곡물이 ‘가루’가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밀가루’에 한정된다. 한마디로 일정 비율 이상의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 먹고, 때때로 밥 대신 밀가루 음식을 먹으라는 뜻이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잡곡’은 억울한 말이다. 한자로는 ‘雜穀’이라 쓰니 잡스러운 곡식이란 뜻이다. ‘雜(잡)’과 반대되는 뜻을 가진 한자는 ‘純(순)’이니 ‘순곡(純穀)’이 아닌 곡식이 ‘잡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순곡’은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은 단어이고, ‘순곡주’에서나 용법과 뜻을 가늠할 수 있는 단어이다. 오로지 쌀만 순수한 곡식이고 나머지는 모두 잡스러운 곡식이라는 뜻이다. 곡식에 등급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쌀에 대한 우리의 집착 때문에 졸지에 쌀 이외의 것은 잡스러운 것이 돼 버렸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그 목록이 다르긴 하지만 잡곡은 보통 ‘조, 피, 기장, 수수, 옥수수, 메밀’을 가리킨다. ‘조’나 ‘기장’은 밥에 섞여 있는 조그맣고 노란 알곡으로 가끔 보이고, ‘수수’는 경단이나 부꾸미 재료로 쓰인다. ‘옥수수’와 ‘메밀’은 흔히 먹을 수 있으니 누구나 알고 있다. 뜻밖인 것은 ‘피’인데, 김매기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풀이다. ‘피’는 오래 전에는 주된 작물이었고, 가끔씩 구황 작물로 재배되던 것이었는데 벼농사가 자리를 잡고 난 이후에는 ‘잡곡’을 넘어 ‘잡풀’이 되어 버린 비운의 작물이다.

하얀 쌀밥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집착은 멀쩡한 곡물을 잡스러운 것으로 만든 것 외에도 여러 가지 것에서 확인된다. 만주 땅은 물론 저 멀리 중앙아시아의 너른 땅까지 논농사를 전혀 몰랐던 지역이라도 우리 민족이 가게 되면 땅을 개간하고 물을 끌어 들여 벼농사를 지었다. 비록 태어난 땅을 떠나 살지언정 쌀밥은 먹어야겠다는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다. 식당의 차림표에 오로지 ‘흰밥’을 뜻하는 ‘백반’이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그렇다. 명절날, 생일날 외에는 흰밥을 먹기 어려운 시절에 식당에 가서나마 흰밥을 먹고자 해서 생긴 메뉴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그 당시 혼식의 주된 재료 둘이 잡곡의 목록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보리’와 ‘콩’이 그것이다. 오로지 보리로만 밥을 지은 ‘꽁보리밥’과 깔깔함을 눅이기 위해 두 번 삶아야 해서 ‘곱삶이’란 말도 있는데 보리는 잡곡에는 끼이지 않는다. 먹기에 나쁘고, 먹은 것이 다 방귀로 배출되는지 금세 허기가 지긴 해도 쌀과 많이 닮아 있으니 잡스럽다고 여기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콩 또한 곡물이기는 하되 탄수화물이 주된 영양 성분인 다른 곡식과 달라서 잡곡에서 빠졌는지도 모른다. 종류가 다양한 콩은 잡스러운 곡물로 묶이기보다는 별도의 부류로 다뤄진다.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어 지구의 반을 먹여 살리는 ‘밀’도 빠져 있다. 서구인들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빵의 재료가 밀이고, 갖가지 음식의 재료로 사용되는 밀의 중요성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밀은 우리 땅과는 영 맞지 않는다. 재배가 쉽지 않으니 구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진짜 가루, 혹은 귀한 가루를 뜻하는 ‘진가루’라 불리기도 했다. 우리 땅에서는 귀한 것으로 대접을 받았지만 중국에서는 전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중국인들이 단어 하나하나에 새로운 한자를 붙이는 것을 생각하면 ‘밀’을 뜻하는 한자가 따로 있어야 하는데 없다. 보리를 뜻하는 ‘麥(맥)’을 같이 쓰거나 작은 보리를 뜻하는 ‘小麥(소맥)’으로 쓴다. 엄연히 다른 작물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보리의 아류 정도로 취급을 받는 것이다.

우리 땅에서 밀이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서 찾을 수도 있다. 모든 곡식을 밥과 관련짓고, 쌀에 섞어 밥을 짓는데 밀은 그리할 수가 없다. 통밀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곱게 가루를 내어 여러 가지로 가공해야 한다. 찰지고 윤기가 흐르는 밥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가루’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밀’이 ‘가루’ 또는 한자 ‘粉(분)’으로 대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곡물이든 빻으면 가루가 되지만 밀가루가 아닌 다른 곡식을 빻아 만든 것은 ‘분식’이 아니다. 쌀을 가루 내어 만든 것은 ‘떡’이고, 잡곡과 콩을 가루 낸 것은 ‘고물’이다. 분식은 오로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뜻한다.

 

 

홀대를 받는 밀가루로 만들어서인지 ‘분식’은 또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식당의 유형 중 하나인 ‘분식집’을 생각해 보면 된다. ‘분식집’ 본래의 의미대로라면 국수, 라면, 떡볶이, 만두 등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분식집에 가 보면 김밥, 찌개, 탕은 물론 돈가스까지 온갖 것을 다 판다. 이것저것 다 팔고 있으니 다른 식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오직 가격이 싸고 허름하다는 것만 차이가 난다. 돈 없고 바쁜 이들이 짧은 시간 좁은 식탁 밑의 동글 의자에 앉아 한 끼를 ‘때우는’ 음식점이 바로 ‘분식집’이다. 밀가루가 홀대를 받으니 그로부터 파생된 식당마저 천대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없어서 못 먹던 쌀이 창고에 쌓인 채 썩어 나가고 있다. 커다란 밥그릇에 고봉으로 먹던 밥이 그릇 크기도 대폭 줄고 그나마 바닥보다 조금 높게 밥을 푼다. 탄수화물이 성인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주된 탄수화물 공급원인 밥이 주범으로 취급받는다. 밥이 주인인 ‘백반’보다는 고깃덩이가 주인인 메뉴가 더 환대를 받고, ‘확실한 무엇’이 있는 일품요리가 각광을 받는다. ‘가루’로 만든 음식인 빵과 국수가 밥의 자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밥상이 식탁으로 대체되면서 ‘밥상’을 여전히 ‘밥상’이라 해야 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순곡’인 쌀이 뒷전으로 밀리는 대신 ‘잡곡’이 득세를 한다. 하얀 쌀밥보다는 검은 쌀밥인 ‘현미(玄米)’가 권장되고, 쌀을 아끼기 위해 섞었던 잡스러운 곡물들이 이제는 건강을 위해 섞어야 하는 것으로 권유를 받는다. 온갖 잡스러운 곡식을 섞어서 갈아 놓은 것이 ‘선식’으로 대접받는다. 이 ‘선식’이 신선이 먹는다는 ‘仙食(선식)’인지, 신선하다는 ‘鮮食(선식)’인지, 불가에서 머리를 맑게 해 준다는 ‘禪食(선식)’인지 알 수 없으나 쌀가루보다는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린다. 쌀이 잡곡은 물론 가루보다 가치가 떨어졌다.

그렇다고 쌀이 서러울 이유도 없고, 잡곡이나 가루가 으쓱할 까닭도 없다. 생물로 치면 모두가 진화의 마지막 산물이고, 작물로 치자면 재배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들이다. 풍족해지니 비로소 각각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을 받는 것일 뿐이다. 채식과 육식을 모두 하니 인간을 잡식 동물이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잡식 동물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 동물이다. 귀하다고 집착하지 않고, 잡스럽다고 하여 홀대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건강한 잡식 동물이 될 수 있다.

 

눈을 언어로 돌려도 마찬가지다. 표준어를 ‘순곡’으로 여기고, 방언을 ‘잡곡’으로 여기는 시각들도 있다. 고유어만 순수한 우리말로 여기고, 한자어를 비롯한 외래어는 순화해야 하는 말로 취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잡곡은 잡스러운 것이 아닌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해 주는 곡물의 하나이듯 방언 또한 귀한 우리말의 자산이다. 고유어로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 내기 어려운 것을 대신해 주는 외래어들도 잘만 반죽하면 든든한 우리말의 한 끼가 된다. 정말로 해가 되는 것들을 잘 솎아 내면 건강한 우리말 밥상이 될 수 있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