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서울 경전철 신림선이 머지않아 첫돌을 맞이한다. 작년 5월 28일 개통한 뒤로 10개월간 운행을 이어왔다. 신림선은 샛강역부터 관악산(서울대)역까지 4개의 환승역을 포함해 총 11개의 역을 가진 노선이다. 여의도와 서울대를 이어 서남권(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의 교통난 해소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 이 중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역 이름이 있다. 11개의 역 중 이용객 수가 가장 많은 관악구 신림동의 ‘서울대벤처타운역’이다. 영어단어 벤처(venture)는 ‘모험하다’, ‘위험을 무릅쓰다’라는 뜻으로, 벤처기업은 창조적 아이디어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도전적인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을 의미한다. 국립국어원은 ‘벤처기업’을 ‘개척 기업’, ‘모험 기업’으로, 규모가 작은 소도시를 의미하는 타운(town)은 ‘구역’으로 다듬어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서울대벤처타운역.
우리말로 순화한 단어가 본래 의도한 의미를 잘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벤처’라는 말을 용인할 수 있다고 해도 뒤에 ‘타운’까지 붙이는 건 누가 봐도 억지스럽다. 신림동 주민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인 ‘고시 타운(고시촌)’이나 ‘순대 타운(신림역 주변 순댓집 상권)’은 한국어가 합쳐진 합성어라 어색하지 않지만 ‘벤처타운’은 그동안 주민들의 입에 한 번도 오르내리지 않았던 말이다.
실제로 지역 구민 중 상당수가 역명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역명의 뜻풀이와 인식에 대한 질문에 신림동 주민들은 "좋은 말은 다 가져와 쓴 것 같다", "서울대랑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발음하기 어렵다", "지역(모습)을 떠올리기 어렵다" 등의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2번 출구 이름은 차마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다. 바쁜 출퇴근길 가운데 ‘창업 HERE-RO 3’를 보고 단숨에 그 뜻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창업 HERE-RO 3는 역 인근의 벤처기업육성 촉진기구다.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보통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이름을 정할 때 지역명이나 대표적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짓곤 한다. 해당 지하철역은 가까운 거리에 학교와 시장이 있다. 주변 버스 정류장 이름은 삼성동 시장 입구, 대학동 고시촌 입구, 신성초등학교다. 이들은 충분히 지역의 대표성을 띠고 있음에도 역명 후보지에 등록조차 되지 않았다.
2021년 3월, 해당 역명을 두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2차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다른 10개의 역은 이미 이름이 다 정해진 상황이었다. 역명 후보는 고시타운, 박종철, 복은말, 서울대벤처타운, 서울대캠퍼스타운, 양지, 원신림까지 총 7개가 있었다. 주민투표 결과 고시타운(36%)이 1순위로 뽑혔지만, 관악구 지명위원회는 선호도 조사 결과를 반영하지 않고 2순위였던 서울대벤처타운(18%)를 역명으로 정해 서울시에 보고했다.
왜 관악구는 주민의 의견을 못 본 척하고 서울대와 도보로 30분이 떨어져 있는 이곳에 서울대라는 이름을 가져와 썼을까? 박준희 관악구청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신림동 고시촌을 서울대학교와 연계해 이 지역에 '청년'과 '서울대'라는 우수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벤처창업을 선도하겠다”라고 밝혔다.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폐지로 인해 고시촌이 쇠퇴한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이 해당 지역 정책과 역명 선정 과정 중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역명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본 결과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쇄신이 필요하다면 벤처타운이라는 어려운 말 대신 ‘창업단지’를 사용해도 좋았을 것이다.
애초에 후보지를 살펴보면 우리말을 쓰려고 한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역명 후보였던 ‘서울대캠퍼스타운’도 ‘대학촌’, ‘대학거점도시’로 순화할 수 있다. 박종철, 복은말, 양지, 원신림은 역명으로 선정될 만큼 지역 느낌이 잘 드러나는 이름이 아니다. 학교나 시장의 이름을 땄어도 좋았을 것이고 녹두거리(서울대 대학가)라는 이름을 썼다면 대학동 상권도 홍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명을 두고 더 많은 논의가 이뤄졌어야 한다.
지역 정체성 제고라는 명목하에 편의성과 민주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잃었다. 역명이 길고 영어가 많아서 기억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역명 선정 과정도 비민주적이었다. 우리말 순화 절차가 번거롭다는 이유와 영어 이름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는 잘못된 기대만으로 대중의 편의를 짓밟아서는 안 된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교통약자를 배려해서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우리말 이름을 지어야 한다. 한 번 정해진 이름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논의 과정부터 시간을 충분히 갖고 꼼꼼히 살펴야 한다.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김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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