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애인 권리 예산의 확보를 요구하는 자리에서 지지발언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꼬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해야 할 걸 “장애인과 비정상인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야할 걸 ‘비정상인’이라고 했으니, 시각장애인인 나조차 아직도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낱말짝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보다.
그럼에도 이제 제법 많은 사람에게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낱말짝이 자리를 잡아간다. 장애인 외에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비장애인으로 일컫자는 의견이다. 그전에는 ‘장애인-정상인’이라는 낱말짝이 자주 쓰였는데, 그런 구도라면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냐는 문제 제기가 많았다. 세상을 장애가 없는 사람의 기준에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태도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니,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라는 주제가 사람들에게 민감하게 다가가나 보다.
언어적 차별은 차별어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장애인-정상인’과 같은 낱말짝이나 서울 중심의 ‘상행선-하행선’ 같은 낱말짝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남자 교수에게는 ‘남교수’라고 안 하지만 ‘교수-여교수’처럼 사회적 약자인 특정 집단을 특이 현상인 양 부름으로써 보편적이지 않고 주류가 아니라는 인상을 풍기게 하는 형식도 있다. 물론 ‘맘충, 한남충, 김치녀’처럼 혐오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혐오표현이 가장 노골적인 차별어이며, 차별의 전통을 담고 있는 ‘암탉이 울면.... 어디서 여자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등의 말도 혐오가 밴 차별어의 한 가지 형식이다.
노골적인 차별어 어휘에 대해서는 선악 판단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구조적으로, 역사적으로 벌어진 차별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차별어를 차별어로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예를 들어 ‘유모차’와 같은 용어가 아이 키우는 일은 여성의 고정적인 성 역할이라는 말빛을 풍기므로 이를 ‘유아차, 아기차’로 바꾸자고 할 때 어느 특정 역사 시기에 여성이 육아를 주로 담당했던 사실을 변치 않는 자연 섭리처럼 받아들였던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이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어에 대해 고민할 때는 생각을 매우 개방적으로, 탄력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 세상 변화를 통해서 깨달을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공부를 해야할 수도 있다. 다만, 두 가지 경우에 자주 논란이 일어난다. 이게 차별이냐 아니냐 갑론을박을 해대는데,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을 이름에 붙이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비유적 표현으로 장애나 여성을 거론할 경우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언제든 ‘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반드시 차별적이냐는 질문이 있다. “여교수들은 이래서 문제다, 여직원들은 이래서 한계가 있다”라고 집단화하여 여성 구성원을 차별하는 언사는 당연히 차별 행위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일부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어 조직 이름을 붙이는 경우에,그것이 스스로 차별의 올가미를 거는 일이라고 볼 까닭은 없다. ‘여성노동자회, 여의사회, 남자간호사회’ 등의 사회적 약자 모임에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스스로 차별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화, 힘 모으기 장치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둘째, 비유적 표현으로 ‘치마바람, 처녀작’ 또는 ‘외눈박이’처럼 여성과 장애를 들먹이는 경우에 이게 언어적 차별이냐는 논란이다. 내가 보기엔, 말한 이에게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말을 접한 여성이나 장애인에게는 그것이 차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외눈박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의 말은 혐오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말이 아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부르기 위해 지은 이름인데, 그 존재들을 차별했기 때문에 그 이름들도 차별의 용례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말 안에 차별의 말빛이 깊이 아로새겨져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이 차별의 느낌을 받게 된다. 대체로 인용과 경구에서 많이 쓰이는 이런 말은 요즘의 말로 바꾸어야 한다. 굳이 차별 시비를 일으키면서 이런 말을 사용해야 할 까닭이 없다. “세상을 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세상의 다양한 면을 모두 봐라, 편견을 가지고 한쪽만 보지는 말라.” 뭐, 이렇게 말하자는 것이다.
차별어가 나쁘다는 사실은 굳이 근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차별의 부당함을 알아채는 순간 싹트게 된다. 남녀 차별, 장애 차별, 지역 차별, 인종과 민족 차별, 외모 차별 등은 비교적 차별의 부당성이 명백하므로 차별어의 사용에는 나쁜 짓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얼마 전까지는 지위와 재산에 따른 차별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고, 학벌과 학력의 차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매우 걱정스럽게도, 이런 시각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능력과 노력을 기준으로 차등적으로 대우하고 보상하는 것은 죄악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다 보니 성공한 이와 실패한 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하는 것이 무슨 문제겠냐는 일종의 뻔뻔함이 바짝 고개를 뜬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과를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능력주의 신념은 특권이나 편법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신념이 도가 지나치면 성공과 성과에 배어 있는 다양한 행운과 보이지 않는 타인의 수고를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만 생각하게 하여 ‘능력자’들을 오만하게 만들고 ‘무능력자’들을 저주받은 존재로 낙인찍는다. 여기서 언어, 특히 외국어가 구조적 차별의 장치로 작동한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채용 때 영어 능력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전반적인 능력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영어 성적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확인해준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 능력은 선발의 기준이자 사회적 자격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여 배운 티를 내는 것,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능력자들이 겉으로 학벌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 낮은 학력, 안 좋은 학벌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외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저 그들 스스로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마구 쓰는 걸 전혀 이상해 하지 않고, 영어 모르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기도 어려운 구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공동체 성원을 배려하면서 불평등을 줄이려는 언어 문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넘기 어려운 구조적 차별인 셈이다.
차별어 어휘 사용이 선과 악을 가를 수 있는 분명함을 가지고 있다면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영어 남용과 여기에서 비롯한 언어적 차별은 선과 악으로 가르기가 쉽지 않다. 어느 지점까지는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공동 선’의 관점에서 영어 남용을 줄이자고 말할 수 있을까? 우선 공공영역과 개인영역을 나눌 필요가 있겠다. 우리네 공용어가 한국어인 이상 적어도 공공영역에서는 우리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말로 표현하자는 합의가 가능하다. 그것이 외국어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을 줄이고 정보 접근의 불평등 구조를 풀어가는 첫걸음이니까. 개인 영역에서도 그저 개인의 취향에 맡길 일만은 아니리라. 개인의 전문 영역에서 우리말 위주로 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지식 대중화의 발판이 된다. 개인이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위주로 대화하려는 노력 또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으로서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북돋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가치를 선택하는가, 언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가는 개인의 자유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언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안에 평등과 차별의 구조가 반영되고, 현실에서는 언어가 능동적으로 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 이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 <말과 글> 제174호에도 실렸습니다.
우리말 비빔밥(이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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