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실버 푸어(silver poor)’와 ‘에듀 푸어(education poor)’다.
먼저 ‘실버 푸어’부터 살펴보자. ‘실버(silver)’는 나이가 들어서 하얗게 센 머리를 빗대어 노년층을 일컫는 데 흔히 쓰이는 말이고 ‘푸어’는 ‘가난, 빈곤’을 뜻한다. 그러니까 ‘실버 푸어’는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 해, 퇴직 후 바로 빈곤층에 진입하는 사람 혹은 그런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시대로 진입하고 은퇴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실버 푸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명한 투자와 자산 형성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기사(<파이낸스투데이> 2020년 12월)가 그 용례다. 다만 영어권 검색 사이트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한국식 조어’인 듯하다.
한편 ‘에듀케이션(education)’과 ‘푸어’를 결합한 말로, 사실 각 단어의 뜻만 보면 ‘교육을 받기 어려울 정도로 빈곤한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과다한 교육비 지출로 가난해져 살기가 어려운 계층(우리말샘)”을 가리키는 데 쓰이고 있단다.
2011년 12월 <매경이코노미>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하우스 푸어’, ‘스톡 푸어’, ‘베이비 푸어’ 등 각종 과잉 투자(주택 마련, 주식 투자, 자녀 출산과 양육을 위한 과다 지출)에 영어이름을 붙인 말들과 함께 소개되었다. 최근에도 <머니투데이> 2023년 1월자에 “학부모 상당수가 올해도 사교육 지출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빚을 지면서도 많은 교육비를 지출하는 ‘에듀 푸어’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도되는 등, 이 용어는 빈곤해서 교육을 못 받는 ‘교육 소외층’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교육이 빈곤의 ‘원인’이 된 사람들을 일컫는 데 주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둘 다 ‘푸어(빈곤)’를 품고 있으면서도 말이 만들어진 맥락에 차이가 있는 만큼 우리말로 다듬는 과정도 서로 달랐다. 우선 ‘실버 푸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푸어’가 들어간 외국어는 지금까지 대부분 우리말 순화 과정에서 ‘빈곤층’으로 옮겨왔기에 이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실버’의 경우 기존에는 공경의 뜻을 담아 ‘경로’, ‘어르신’ 등으로 다듬은 바 있는데(실버 시터→ 어르신 도우미/경로 도우미, 실버 비즈니스→ 경로 산업), 경제적 조건에 따라 계층을 가른 이번 용어에는 중립적인 단어로 ‘노년, 노후, 노인’ 등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후보로 올린 ‘노년 빈곤층’, ‘노후 빈곤층’, ‘노인 빈곤층’ 중 ‘노년 빈곤층’과 ‘노후 빈곤층’이 여론조사에서 둘 다 비슷한 지지를 얻어 우리말로 복수 선정되었다.
‘에듀 푸어’를 다듬는 것은 좀 더 까다로웠다. 기존 사례를 기준으로 다듬은 말은 ‘교육 빈곤층’이었다. 교육비 과다 지출은 주로 사교육 영역에서 이뤄지므로 ‘사교육 빈곤층’도 함께 후보로 올렸다. 하지만 “가난해서 교육의 혜택을 못 받는 빈곤 계층”을 뜻하는 말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지나친 지출 규모가 빚어낸 ‘상대적 빈곤’을 ‘절대 빈곤’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는 판단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교육비 빈곤층’ ‘과교육 빈곤’ ‘교육 과잉 빈곤층’ ‘교육 탓 빈곤층’ 등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게 후보말을 고민해 보았으나 그리 알맞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덧붙인 후보말이 아예 ‘빈곤’이라는 말의 틀을 벗어버린 ‘교육 과소비층’이었다. 원말의 ‘푸어’라는 표현과는 거리감이 들 수도 있으나 의미상으로 가장 적절하다는 의견이었고, 과연 여론조사에서도 이 말이 가장 큰 지지를 얻어 결국 최종 새말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실버 푸어’와 ‘에듀 푸어’는 같은 ‘푸어’를 포함한 말인데도 ‘노년(노후) 빈곤층’과 ‘교육 과소비층’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새 단장을 했다. 하지만, 이 둘은 실상 현실 세계에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용어들이다. 노년(노후) 빈곤층이 한창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에 은퇴 후 생활 자금을 미처 모으지 못한 원인 중에는 자녀의 교육비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투자한 ‘교육 과소비’가 한몫하기 때문이다.
이를 지적한 전문가들도 적지 않으니, 다음의 기사가 이를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자녀 교육비 지출로 빈곤하게 사는 ‘에듀 푸어’가 ‘실버 푸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중략) 노후를 대비해야 할 40·50대가 가장 많은 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경제> 2023년 6월자)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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