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은 남이 가진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 적에 내가 내놓는 값어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내가 가진 무엇을 남에게 건네주고 대신 받는 값어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때 건네주는 쪽은 값어치를 ‘내놓아야’ 하지만, 값어치를 건네받는 쪽은 값을 ‘치러야’ 한다. 값어치를 내놓고 값을 받는 노릇을 ‘판다’ 하고, 값을 치르고 값어치를 갖는 노릇을 ‘산다’ 한다.
팔고 사는 노릇이 잦아지면서 때와 곳을 마련해 놓고 많은 사람이 모여 종일토록 서로 팔고 샀다. 그때를 ‘장날’이라 하고, 그곳을 ‘장터’라 한다. 본디는 파는 쪽에서 내놓는 것도 ‘무엇’이었고, 사는 쪽에서 값으로 치르는 것도 ‘무엇’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슬기가 깨어나면서 ‘돈’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는 쪽에서는 돈으로 값을 치르는 세상이 열렸다. 그러자 돈을 받고 무엇을 파는 노릇을 일로 삼는 사람도 생겼는데, 그런 일을 ‘장사’라 하고, 장사를 일로 삼은 사람을 ‘장수’라 부른다.
장사에는 언제나 ‘값’으로 골치를 앓는다. 값을 올리고 싶은 장수와 값을 낮추고 싶은 손님 사이에 밀고 당기는 ‘흥정’이 불꽃을 튀기지만, 언제나 가닥이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흥정하면서 장수는 값을 끌어올리려 하고 손님은 값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렇게 장수와 손님이 벌이는 실랑이를 ‘에누리’라 한다.
에누리하기 위해 벌이는 흥정은, 파는 쪽에서 받겠다는 값을 내놓거나 손님 쪽에서 사겠다는 값을 내놓아야 시작할 수 있는데, 파는 쪽에서든 사는 쪽에서든 흥정해 볼 수 있도록 내놓는 값을 ‘금’이라 한다. 그러니까 ‘금’은 흥정을 벌일 수 있도록 던져두는 빌미다. 그처럼 금을 던져두는 노릇을 ‘금을 띄운다’ 하고, 이렇게 띄워 놓은 금을 ‘뜬금’이라 한다. 뜬금이 있어야 에누리로 흥정을 거쳐서 값을 매듭짓고 거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에누리와 흥정으로 벌이는 실랑이는 본디 성가신 노릇이겠지만, 사고팔 무엇이 값진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래서 생겨난 것이 ‘거간’이다. 거간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금을 띄워 주고 흥정의 가닥을 잡아 주는 노릇을 말한다. 그래서 흥정을 이루어 내면 산 쪽과 판 쪽에서 얼마씩의 몫을 떼어 거간 노릇을 한 사람에게 주는데, 이를 ‘구전’이라 하고 거간으로 얻은 구전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거간꾼’이라 한다.
▲ 거간꾼이 금을 부르면 살 사람은 에누리해달라고 한다(그림 이무성 작가)
요즘 세상에는 거간이니 흥정이니 하는 노릇이 많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사려는 사람 앞에 내놓는 물건은 모두 값을 달아 놓고 흥정 없이 사고팔도록 나라가 법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만든 물건도 만든 사람이 아예 값을 매겨서 에누리를 못 하도록 해 놓고, 자연의 도움으로 얻어 내는 농ㆍ축ㆍ수산물에도 조합 따위의 조직에서 값을 매겨 흥정 못 하도록 막는다.
그러나 속내를 조금 들여다보면 아직도 에누리와 흥정은 그런 틈새를 비집고 살아 있어서,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나라에서 ‘공인중개사’라는 이름의 거간꾼을 만들어서 집이나 논밭같이 값진 물건은 이들 거간꾼을 거치지 않고는 팔지도 사지도 못하도록 해 놓았다. 이는 나라가 장사에 끼어들어 ‘세금’이라는 이름의 구전을 뜯어내려 하는 노릇이다.
‘삯’은 무엇을 얼마간 빌려 쓰는 데 내놓는 값어치다.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내놓는 ‘값’과는 아주 다른 낱말이다. ‘찻값’이나 ‘뱃값’은 차나 배를 사서 내 것으로 만드는 데 내는 돈이고, ‘찻삯’이나 ‘뱃삯’은 차나 배를 얼마간 빌려 타는 데 내는 돈이다. 택시, 시내버스, 지하철, 시외버스, 고속버스, 기차, 여객선, 비행기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면서 내는 돈은 모두 ‘삯’이다. 이것들을 손수 몰고 다닌다 해도 빌려서 몰고 다니면, 내는 돈은 ‘값’이 아니라 ‘삯’이다.
‘삯’ 가운데서도 손꼽힐 것은 ‘품삯’이다. ‘품’은 사람의 힘과 슬기의 값어치를 뜻하므로, ‘품삯’은 사람의 힘과 슬기를 빌려 쓰고 내는 값어치를 말한다. 품을 빌려주고 삯을 받는 사람을 ‘삯꾼’이라 하는데, 삯꾼에게 시키는 일이 바느질이면 그것을 ‘삯바느질’이라 하고, 삯바느질하고 삯꾼이 받아 가는 돈을 ‘바느질삯’이라 한다.
이처럼 품을 빌려주고 삯을 받기도 했지만, 본디는 품을 빌려주고 다시 품을 되돌려 받는 ‘품앗이’가 제격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아예 품을 팔아서 먹고살기도 했는데, 그들을 ‘품팔이’라 했다. 그나마 잇달아 팔지 못하고 하루하루 일을 찾아야 하는 품팔이는 ‘날품팔이’라 했는데, 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파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받는 보상은 ‘삯’이 아니라 ‘값’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품값’(모두 우리말 ‘품값’이라 하지 않고, 일본말 ‘임금(賃金)’ 또는 ‘노임(勞賃)’이라 한다.)이다. 이른바 산업 사회라는 세상이 모든 사람을 품팔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품을 빌려주는 노릇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품을 팔아서 살아가야 하니까, 이제 품앗이와 품삯은 사라지고 품값이 세상 위로 떠오른 것이다.
품을 사고파는 세상이 되었으니 품 금을 내어놓고 흥정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데, 파는 사람은 힘이 없고, 사는 사람은 힘이 넉넉하여 흥정은 공평하기 어렵다. 이래서 품꾼들이 일어나 ‘노동조합’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품을 사는 쪽과 맞서니 다툼이 벌어지기 일쑤다. 이들의 다툼은 해마다 봄만 되면 싸움으로 치달아 나라가 온통 시끄럽고, 정부에서 거간을 맡아 나서도 흥정은 번번이 찢어진다. 품으로 만들어 내는 값어치를 저울에 달아 보면 품의 값은 곧장 나타나련만, 흥정은 늘 찢어지고 싸움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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