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다’와 ‘즐겁다’는 누구나 자주 쓰지만 뜻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 헷갈리는 낱말이다.
· 기쁘다 : 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나다.
· 즐겁다 :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믓하고 기쁘다.
《표준국어대사전》
국어사전에서 ‘기쁘다’를 ‘즐겁다’ 하고, ‘즐겁다’를 ‘기쁘다’ 하니 사람들이 어찌 헷갈리지 않을 것인가!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아 읽는 어느 책에서는 ‘즐겁다’를 “느낌이 오래가는 것”이라 하고, ‘기쁘다’를 “느낌이 곧장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쓰임새를 더듬어 뜻을 가리려 했으나, 이 역시 속살에는 닿지 못한 풀이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서로 비슷한 구석도 있고, 서로 다른 구석도 있다. 서로 비슷한 구석은 무엇인가? ‘기쁘다’와 ‘즐겁다’는 모두 느낌을 뜻하는 낱말이다. 기쁘다는 것도 느낌이고 즐겁다는 것도 느낌이다. 그냥 느낌일 뿐만 아니라 좋은 쪽의 느낌이라는 것에서 더욱 비슷하다. 마음이 좋고, 기분이 좋고, 몸까지도 좋다는 느낌으로서 ‘기쁘다’와 ‘즐겁다’는 한결같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구석은 무엇인가? ‘기쁘다’와 ‘즐겁다’는 느낌이 빚어지는 뿌리에서 다르다. 좋다는 느낌이 마음 깊은 데서 몸으로 밀고 나오면 기쁘고, 좋다는 느낌이 몸에서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면 즐겁다. 쉽게 말하면, 기쁘다는 느낌은 마음에서 오고 즐겁다는 느낌은 몸에서 온다. 더욱 쉽게 말하면, 기쁨은 마음의 것이고 즐거움은 몸의 것이다. 이만큼 서로 다른 낱말이다.
일테면, 달고 향긋한 참외를 먹으면 즐겁다.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거나 좋은 영화를 보아도 즐겁다. 산골 개울물 소리를 듣거나 훌륭한 음악을 들어도 즐겁다. 술래잡기하고, 춤을 추고, 사물놀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나아가 씨름하고, 공차기해도 즐겁다. 이런 즐거움들은 모두 입과 눈과 귀를 비롯하여 몸을 움직이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 ‘기쁘다’와 ‘즐겁다’는 마구 헷갈리는 낱말이다.(그림 아무성 작가)
한편, 전쟁터에 나갔던 아들딸이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버이는 기쁘다. 병환으로 몸져누우셨던 어버이가 깨끗이 나아 일어나면 아들딸은 기쁘다. 입대하여 헤어진 애인에게서 날아온 편지 한 장은 아가씨를 기쁘게 한다. 레슬링 선수로 올림픽에 나간 남편이 금메달을 땄다는 방송 소식은 아내를 기쁘게 한다. 이런 기쁨은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속내는 반대말로써 더 잘 드러난다. ‘기쁘다’의 반대말은 ‘슬프다’이고 ‘즐겁다’의 반대말은 ‘괴롭다’인데, 슬프다는 느낌은 마음에서 오고 괴롭다는 느낌은 몸에서 오는 줄을 훨씬 뚜렷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하루 종일 땡볕에서 져다 나르며 시달리는 일꾼의 몸은 몹시 괴롭다. 금쪽같이 키워 놓은 자식이 홀어머니를 아랑곳없이 노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어머니의 마음은 몹시 슬프다. 몸으로 겪는 일이 힘겹고 고달플 적에 괴롭기는 하지만 슬픈 것은 아니고, 마음으로 겪는 일이 쓰라리고 힘겨울 적에 슬프기는 하지만 괴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둘이면서 또한 하나이듯이 몸에서 빚어지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의 느낌도 마음에서 빚어지는 기쁨이나 슬픔의 느낌과 더불어 둘이면서 또한 하나다. 그래서 몸에서 빚어지는 즐거움과 마음에서 빚어지는 기쁨은 쉽사리 서로 넘나들며 어우러지고, 마찬가지로 몸에서 빚어지는 괴로움과 마음에서 빚어지는 슬픔도 서로 쉽사리 넘나들며 어우러진다.
이때 기쁨과 즐거움이 어우러진 느낌을 드러내는 낱말은 없지만, 슬픔과 괴로움이 어우러진 느낌을 드러내는 낱말은 있어서 눈에 띈다. ‘서럽다’가 바로 그 낱말이다. 몸이 고달픈데 마음까지 슬프면 그것을 서럽다고 한다는 말이다.
이런 낱말의 속살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으면, 섬세하게 서로 다른 뜻과 느낌을 올바로 가려서 쓰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기쁘고 슬프거나 즐겁고 괴로운 것이 모두 느낌인데, 느낌이란 몸에서 마음으로 들어가는 가장자리에 자리 잡아서 가늠이 더욱 어렵다. 그만큼 우리 토박이말의 속살은 바로 우리네 몸이며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없이 그윽하고 신비로워서 알뜰하게 가르치고 조심스레 쓰지 않으면 쉽사리 망가지고 허물어지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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