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18,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는개(비)’와 ‘느리(눈)’

튼씩이 2024. 2. 10. 09:13

 ‘는개’는 국어사전에도 올라서 꽤 널리 알려진 낱말인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풀이해 놓았다. 굳이 틀렸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알맹이를 놓쳐서 많이 모자라는 풀이다. ‘는개’는 ‘늘어진 안개’라는 어구가 줄어진 낱말임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개 방울이 굵어지면 아래로 늘어져 거미줄 같은 줄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으며 비가 되는데, 이런 것은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안개 쪽에다 붙여 ‘는개’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는개’처럼 비라고 하기가 어려워 비라고 하지 않은 것에 ‘먼지잼’도 있다. ‘먼지잼’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를 땅으로 데리고 내려와서 잠재우는 것’이라는 뜻의 풀이를 그대로 줄여 만든 이름이다. ‘먼지잼’은 빗방울이 ‘는개’처럼 아주 작기도 하지만, 공중의 먼지만을 겨우 재워 놓고 곧장 그쳐 버리는 비라는 뜻까지 담고 있다. 자연을 이처럼 깊이 꿰뚫어 보고 감쪽같이 이름을 붙이며 살아온 겨레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먼지잼’과 ‘는개’ 다음으로 가장 가늘게 내리는 비가 ‘이슬비’다. 비가 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풀이나 나무의 잎에 내린 비가 모여서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 떨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비가 오는 줄을 알 만큼은 눈에 보이지만, 내리는 것이 빗방울이 아니라 가루처럼 부서진 것이 흩어져 내리는 비를 ‘가랑비’라 한다. 가루처럼 흩어져 내리는 가랑비에 무슨 옷이 젖으랴 싶어 비옷 없이 바깥에서 어정거리면 저도 모르는 새에 흠뻑 젖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다고 아무렇게나 마음 놓지 말라는 뜻으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하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 '가랑비'는 가라고 내리는 비가 아니라 가루처럼 흩어져 내리는 비(그림 이무성 작가)

 

‘가랑비’보다 굵으나 아직 빗방울 소리는 나지 않고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와 부슬부슬 내리는 ‘부슬비’가 있다. ‘부슬비’를 지나면 이제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여느 비가 되는데, 갈수록 거세지면 와르르 무너지듯이 짜드는 ‘와달비’도 있고, 빗줄기가 장대처럼 굵고 줄기찬 ‘장대비’도 있고, 물동이로 붓듯이 쏟아지는 ‘동이비’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라고 부르지 않는 것으로 여름철의 ‘개부심’과 ‘소나기’가 있다. ‘개부심’은 본디 ‘명개부심’이지만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 ‘명개’는 큰물이 져서 흙탕물이 냇가 자갈밭을 흙먼지로 뒤덮어 놓은 것이고, ‘개부심’은 세차게 내려서 그런 ‘명개’를 깨끗이 부셔 없애 주는 비다.

 

‘소나기’는 갑자기 흩어져 있던 구름이 시커멓게 모이면서 저쪽으로부터 병사들이 쳐들어오듯이 빗줄기가 떼를 지어 달려와서는 삽시간에 솨 하며 지나가 버리는 비다.

 

‘느리’는 국어사전에 오르지도 못한 눈의 이름으로, ‘우박’이라는 한자말에 눌려서 맥을 못 쓰는 ‘누리’와는 아주 다른 낱말이다. 농사짓고 고기 잡는 일을 내버려 눈비에서 마음이 떠난 요즘은 ‘느리’가 내려도 본체만체하기 일쑤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조차도 쓰지 않아 잊어버렸나 싶은 낱말이다. ‘느리’는 ‘늘어진 서리’라는 어구를 줄여서 만든 낱말이다.

 

▲ 밤새 아무도 몰래 살짝 내린 눈은 '도둑눈'이다.(그림 이무성 작가)

 

모두 잠든 한밤중에 남몰래 오다가 그친 ‘도둑눈’이면서, 마치 서리가 늘어진 것처럼 자디잔 ‘싸락눈’이기도 하다. 날이 새고 햇볕이 나면 서리가 녹듯이 곧장 녹아 버리고 마는 수줍고 가녀린 눈이다. 제가 내리고 싶으면 밤이든 낮이든 가리지 않고 보란 듯이 가루처럼 내리는 ‘가랑눈’이나 함박꽃처럼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같은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