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드라마는 스토리보다는 보다 자극적인 장면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끌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 상대방 얼굴에 물 뿌리는 거, 혹시 한 번이라도 보신 분 있나요? 전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오직 드라마 안에만 있을 뿐이죠.”
하지만 이제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겠다 싶다. 내가 몰랐을 뿐, 드라마 속의 일들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대한항공 전무 조현민은 ‘을’인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을 뿌리고 폭언을 했단다.
물론 조씨는 그런 일 자체를 부인했다. 그녀는 “얼굴에는 (물을) 안 뿌렸고 밀치기만 했다”고 주장한다. 밀치는 게 얼굴에 물을 뿌리는 것보다 덜 나쁘다고 믿는 그녀가 대견해 보이지만, 아쉽게도 조씨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당시 현장에 있던 광고대행사 직원이 해당 사실을 부인하는 인터뷰를 했을 것이고, 베트남에 있던 조씨가 갑자기 귀국해 취재진 앞에서 “내가 어리석었다”는, 마음에 없는 말도 안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조씨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건 해당 장면을 찍은 영상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그 장면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면, 조씨는 ‘더워 보여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을 하지 않았을까?
내친김에 대한항공 직원 중 한 명이 조씨의 폭언이 담긴 음성파일을 공개했다. 파일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말투의 천박함도 놀라웠지만, 어떻게 그리 높은 데시벨로 계속 고함을 칠 수 있는지가 더 경이로웠다. 그간 드라마에 조씨 같은 악역이 등장하지 않았던 건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조씨 역을 맡을 만큼 성량이 풍부한 사람이 없어서였으리라. 그런데 제보자에 따르면 조씨의 이런 폭언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란다. 제3자인 내가 잠깐 듣는 것도 괴롭던데, 이런 폭언을 수시로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할까 싶었다. 땅콩 서비스를 빌미로 비행기를 돌린 조씨의 언니 조현아까지 있으니,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것이야말로 ‘극한직업’으로 분류하는 게 맞다. 물론 대한항공 측은 문제의 음성파일 주인공이 조현민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난 그 사람이 조현민이길 바란다. 조현민 말고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또 있다면, 세상이 몇 배쯤 더 무서워질 거다.
조현아와 조현민, 두 자매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이 됐다. 정말 신기한 건 이들의 태산 같은 분노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원하는 걸 다 갖다시피 한 이들이 왜 늘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음성파일의 막말은 광고대행사 팀장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자 벌어진 일이란다. 분노할 기회만 기다리는 사자 앞에서 말이 안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만, 설사 준비가 미흡해 답을 못했다 해도 저런 대규모의 분노를 터뜨리는 건 이상한 일이다. 언니가 저지른 소위 땅콩회항도 일반인이 보기엔 별일 아닌 사건으로 촉발됐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분노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됐을 때 표출된다. 자신이 받아야 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첫 번째 조건이다. 주변인들이 아무리 극진히 모셔도 두 자매는 그 정도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주위의 깍듯함이 진심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서인데, 이건 그들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정식으로 입사시험을 봤으면 모형비행기 회사도 들어가지 못할 실력으로 진짜 비행기 회사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남들이 비웃을까 걱정될 수밖에. 조현민이 트위터에 썼다는 ‘명의회손’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바꿀 수 없다. 자기가 더 대접받아야 한다고 우기는데, 어쩌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즉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고위직은 비록 사기업이라 해도 회사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순간적인 실수라면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처럼 오랜 내공에서 비롯된 만행을 그냥 방치해서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이 조치는 대한항공은 물론, 조씨 개인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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