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125 – 시위

튼씩이 2019. 8. 20. 08:12

몇 년 전 여름, 큰물이 졌을 때 방송사가 띄운 잠자리비행기에서 찍은 화면, 바다처럼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붉덩물과, 사람들의 도시와 마을에 벌창하는 시위를 넋을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성난 물결이라고 하지만, 물에 인간에 대한 무슨 감정과 애증이 있을 것인가. 불이 천성대로 위를 향해 타오르는 것처럼 물은 하늘이 가르친 대로 낮은 곳을 향하여 제 몸을 옮길 따름인 것이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시위를 자연의 시위(示威)로 받아들였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 그러므로 자연 앞에서 건방 떨지 말라는 것, 자연 속에서 몸을 낮추어 살라는 것, 이런 얘기들을 하려고 자연이 이렇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붉덩물은 붉은 황토가 섞여 탁하게 흐르는 큰물, 벌창은 물이 많아 넘쳐흐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시위처럼 비가 많이 와서 다닐 수 없게 길가에 넘쳐흐르는 물은 물마라고 한다.


옛날에는 장마를 ‘오래 내리는 비’라는 뜻에서 오란비라고 했는데, 나중에 ‘오래’를 뜻하는 한자 ‘장(長)’과 비를 뜻하는 ‘마’가 결합해 장마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마는 한자말로 구우(久雨)나 임우(霖雨)라고 하고, 장마 때문에 생긴 큰물은 거침(巨浸)이나 대침(大浸), 또는 대수(大水), 홍수(洪水)라고 한다.


장마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 가운데 단연 압권인 것은 윤홍길의 『장마』다. 이 글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부디 찾아 읽어보라고 앞부분 몇 줄만 맛보기로 소개한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시위 (명)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넘쳐흘러 육지 위로 침범하는 일. 또는 그 물


쓰임의 예 – 장수 이하로 모든 군사들은 어서 하루바삐 큰비가 쏟아져서 강물에 시위가 나기만 기다린다. (박종화의 소설 『임진왜란』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물마 – 비가 많이 와서 다닐 수 없게 길가에 넘쳐흐르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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