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 있는 작물들은 계속 쌓아두라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계속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 쓰라고 하는 것이 곳간에 재정을 비축해두자는 것이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한 말이다. 정부가 돈을 지나치게 쓴다는 비판이 있다면서 저 말을 했는데, 돈이 작물처럼 썩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직책이 대변인이니 이 발언은 그의 소신이라기보다 청와대의 입장이라고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현 정부가 돈을 많이 쓰는 것에 대한 우려는 계속 나왔다. 지난 9월 말 기준 통합재정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인 26조5000억원. 그런데도 경제 상황이 어려워 연말까지 계속 돈을 써야 한다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 경제사의 혁명이라 할 소득주도성장이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에도 왜 경제가 어려운지 모르겠지만, 설령 어려운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재정을 무한정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의 적자는 고스란히 미래세대의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변인의 말을 들으니 현 정부에 우리 후손들에 대한 배려는 없는 모양이다.
그 배려 없음은 다른 곳에서도 이미 드러났다. 먼저 국민연금을 보자. 현재의 국민연금은 개인이 내는 돈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연금을 받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런 추세라면 퇴직자가 많아지는 2050년에는 기금이 고갈돼 국민 세금으로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때라고 세금 쓸 곳이 없는 것은 아닐 테니, 이왕이면 기금이 고갈되는 시점을 최대한 늦추는 게 좋다. 복지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여기에 대한 방안을 부탁했고, 그들은 오랜 기간의 숙의 끝에 보험료율을 현재의 9%에서 12~15%로 인상하는 개편안을 만든다. 더 내고 덜 받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으니, 이 개편안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하지만 2018년 11월 복지부 장관이 보고한 개편안은 대통령에 의해 거부당한다. 당시 일부 보수언론이 ‘대통령 격노, 실무진 멘붕’이라는 기사를 쏟아낸 걸 보면 굉장히 불쾌한 반응을 나타낸 모양이다. 보험료 인상을 골자로 한 개편안이 언론에 미리 보도돼 국민 여론이 들끓었던 것도 이런 반응에 일조했으리라.
연금이 국민 대부분이 노후에 기댈 유일한 생계수단이란 점에서, 연금재정을 튼튼히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당장 욕을 먹더라도 전문가가 제시한 개편안을 시행하는 게 정도였지만,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복지부는 덜 내고 더 받는 마법의 개편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만, 그런 안은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 우리 후손들이 그 부담을 떠안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건강보험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매달 건강보험료를 내고, 아플 때 그 돈으로 치료받는다. “난 병원에 한 번도 안 가는데 보험료 왜 내냐?”라고 하는 분도 있지만, 그래선 안된다. 자기 가족이 그 돈으로 치료를 받는 건 물론이고, 그 자신도 나이 들면 건강보험에 의존해야 하니 말이다. 통계에 의하면 2018년 노인진료비가 30조원을 돌파했는데, 전체 진료비에서 노인진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40.8%란다. 앞으로 고령화가 심해질 것을 고려하면,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젊은이 두 명이 내는 보험료로 노인 한 명이 진료를 받지만, 미래에는 젊은이 한 명이 노인 두 명의 치료비를 대야 할 수도 있다.
돈이 모자라면 당연히 국민 세금이 들어가니, 이런 사태에 대비해 건강보험에 돈을 좀 쌓아놓을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일을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시절 건강보험은 계속 흑자를 냈고, 그 결과 20조원의 적립금이 쌓였다. 여기에 대해 “건강보험 흑자는 나쁜 흑자다. 이 돈으로 병원비나 깎아줘라!”라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노령화를 생각하면 돈을 더 불려놓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소위 ‘문재인케어’를 시작했다. 미용 목적을 제외한 모든 비급여 의료비를 건강보험에서 지급한다는 것이 골자. 여기에 2인실 등의 상급 병실료까지 내주겠단다. 안 그래도 1인당 의료기관 이용횟수가 세계 1위였던 대한민국은 가히 의료천국이 됐다. 그렇다면 개인이 내는 보험료를 올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대통령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보험료 인상에 분노할 국민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에서일 텐데, 아무튼 보험료는 전문가들의 주장에 훨씬 못 미치는 2~3%씩 오르는 데 그쳤다. 물론 이 정도의 인상으로 문재인케어는 가능하지 않기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때 모은 20조원을 쓰면 된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2018년 한 해 동안 3조2625억원의 적자가 났는데, 건보재정이 적자로 돌아선 것은 무려 8년 만의 일이다. 적자 규모가 원래 예상보다 두 배를 넘는 것도 심각한 일인데, 이대로라면 2019년엔 더 큰 적자가 예상이 되고, 20조원이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가까운 미래엔 국민연금이 그렇듯 건강보험도 보험료로 지출을 충당하지 못해 세금을 동원해야 할 듯하다.
그래서 대통령께 여쭙는다. 미래의 후손들은 어떻게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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