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책을 읽자

지폐의 세계사 - 셰저칭

튼씩이 2019. 11. 25. 17:55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은 종이 한 장에는 이렇듯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지폐의 도안은 시대와 역사를 반영하며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축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국가의 지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국가가 숭상하는 위인이나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의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며, 때로는 국가의 전통과 이념을 내포하고, 때로는 통치자의 권력강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즉 지폐는 한 나라의 정체성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도구다. 그 나라 국민들은 지폐를 매일 접하며 자국에 대한 긍지를 드높이고, 외국인들은 이색적인 지폐 디자인을 보며 해당 국가의 이모저모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와 감정을 갖게 된다. 이렇듯 지폐는 국기 다음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제2의 얼굴’이기에 각 나라에서 심혈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대만의 유명한 대중 인문학자이자 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각국의 지폐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지폐 디자인에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비전, 이상이 오롯이 담겨 있어 해당 국가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된다.  - yes24 출판사 리뷰 중 -



스페인의 지폐 발행 역사를 살펴보면 고야는 주제 인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사람 중 하나다. 그만큼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한 예술인이었다. 부르봉 왕조 시대부터 20세기 초 제2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프랑코 장군의 독재 시대에 발행된 지폐에서도 고야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 30쪽 -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앞면에 등장하는 새도 바로 라기아나 극락조다. 2007년 이전에 발행된 지폐에서는 전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8년 이후에는 크기가 축소되어 왼쪽 상단에 자리하게 되었다. 어느 부분에 위치하든 극락조의 기세등등한 자태는 변함없이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주제라 할 수 있다.  - 66쪽 -



세계 화폐의 발행 품목과 수량을 살펴보면 국경을 초월해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콜럼버스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다. 1874년 미국 퍼스트은행이 발행한 1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콜럼버스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미국은 콜럼버스를 남의 땅을 강제로 차지한 인물로 여기는 동시에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의도와 야심을 널리 선포하는 인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 107쪽 -

1995년 발행한 50파운드 지폐는 의외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쥘 베른이 반란의 상징으로 묘사했던, 매우 변덕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브롤터의 원숭이가 여왕의 머리 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반항적인 행동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경건하지 못한 구도와 디자인은 보수 인사들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 167쪽 -


독재자가 인쇄된 지폐를 항상 우리를 일깨운다. 세상은 이렇듯 불완전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이를 위해 분투할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 183쪽 -

1,000리엘이 과거 지폐와 크게 다른 점은 앞면의 도안이다. 앞면에는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바로 희망이 가득하고 낙관적인 기개가 돋보이는 여학생의 미소다. 여학생은 자신감과 긍지가 충만한 얼굴로 침착하면서도 긍정적인 광채를 발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빛나는 미래가 머지않았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 208쪽 -

1993년 1월 정부는 모든 홍콩달러 동전과 지폐를 홍콩 주권 반환에 따라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부터 HSBC 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지폐의 양식을 갱신하면서 식민지 색채를 띤 디자인을 없앴다. 그중에서도 홍콩의 식민지 휘장인 ‘아군대로도'를 없앤 것이 가장 중요하다.  - 234쪽 -

‘데바라자’의 법적 정통성을 계승한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에 즉위해 2016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국가원수였다. 1946년 최초로 지폐에 등장한 이래 그는 줄곧 태국 지폐의 영원불변한 주제가 되고 있다. 지폐를 통해 전 국민에게 슬기와 지혜, 뛰어난 지도력을 지닌 국왕의 위대한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 262쪽 -

2007년 12월 후진 개발도상국을 ‘졸업’한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발전한 곳이다. 카보베르데의 지폐 디자인에서는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와 대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카보베르데에서는 심각한 충돌이 발생한 적이 없었고, 국민들은 관광업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에 지폐 스타일 또한 갈수록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있다.  - 296쪽 -



지페 한 장에 담아내는 내용들이 이렇게나 다양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 나라의 역사와 국민 정서에 따라 인물을 담거나 명화 또는 건축물을 그려 넣는 등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유통되거나 사라져간다는 사실이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내전으로 인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지폐의 인물이 바뀌기도 하고, 정권유지를 위한 독재자가 등장하기도 하며,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 여학생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폐의 인물을 통해 한 나라의 비극적인 역사를 알 수도 있고, 식민지 시대의 과거를 지폐에서 볼 수도 있는 등 지폐를 통해 다양한 세상을 알게 되었다.



  -  목  차 -


1. 색채로 표현한 인간성의 존엄 - 스페인


2. 현대사의 정곡을 찌르는 어두운 상처 - 부룬디·르완다


3. 유행을 주도하는 혁신의 아름다움 - 네덜란드


4. 깊숙한 우림에서 목격한 유혹의 춤  - 인도네시아·트리니다드 토바고·파푸아뉴기니


5. 초원 제국의 눈부신 상상력  - 몽골


6.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 꿈같은 번영 - 일본


7. 제국주의의 강렬한 흔적  - 스페인·도미니카공화국·이탈리아·미국·프랑스·코스타리카


8. 치명적 매력을 지닌 적막의 섬 - 페로제도


9. 슬픔을 간직한 ‘사막의 맨해튼’  - 예멘


10. ‘오웰적인’ 부조리의 나라  - 미얀마


11. 지폐가 한낱 종잇조각으로 변할 때  - 독일


12. 여왕 머리 위의 원숭이 - 지브롤터


13. 공포스런 독재자의 광기 - 북한·이라크·리비아


14. 평온하고 안정적인 대지를 사모하며 - 코스타리카·방글라데시·과테말라·기니비사우·마다가스카르·에리트레아·스웨덴·인도·라오스


15. 속세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앙코르의 미소 - 캄보디아


16. 전통을 중시한 예술가들의 향연 - 프랑스


17. 동양의 진주의 어제와 오늘 - 홍콩


18. 카르파티아 산맥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통곡 - 루마니아


19. 미소의 나라에 숨겨진 통치 신화 - 태국


20. 부조리와 허무가 어우러진 태양의 도시 - 알제리


21. 쓸모없는 어릿광대에서 ‘세계 정복자의 정복자’가 되기까지 - 영국


22.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기억하는 빛바랜 휘장들 - 포르투갈·마카오·앙골라·모잠비크·카보베르데·기니비사우·상투메 프린시페


23. 거북하게 느껴지는 몸뚱이 속의 나 - 독일


24. 격변하는 시대에 생각한 사랑의 이원론 - 이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