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우리말123(성제훈)

(얼레빗) 3321. 밥사밥, 술사발, 국사발, 죽사발

튼씩이 2016. 6. 30. 13:01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다른 얼레빗 모두 보기

단기 4349(2016). 6. 30.



"밥사발" 이라는 말은 요즘은 잘 쓰지 않고 ‘밥공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흔히 쓰던 말입니다. “저녁을 물리자 주모는 텁텁한 밑술을 두 사발이나 떠 들여 넣어 주었다 - 《문순태, 타오르는 강》, 팔기는 손수 쑨, 제법 쌀알이 보기 좋게 깔린 감자 죽사발을 아내의 머리맡에 들여놓는다. - 《김춘복, 쌈짓골》”에서처럼 술을 담으면 술 사발이요, 죽을 담으면 죽 사발로 썼지만 이제 일상에서 사발은 보기 어렵습니다.

사발(沙鉢)은 무늬가 없는 백자(白磁) 사발이 많았는데 백자란 고령토로 그릇을 만든 뒤 투명한 잿물을 씌워서 1300℃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순백의 투명한 자기를 일컫습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보면 "세종 때 어기(御器)는 백자를 전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반인들도 백자 사발을 즐겨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조 때는 백자 사용을 금지하게 되지요. 그 뒤 광해군 8년(1616)부터 일반 사대부에 한정하여 백자 사용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일반인의 조선백자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높아서 암암리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18ㆍ19세기를 지나는 동안 더욱 고급화되면서 생산량도 증가하여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사발에 관한 속담으로는 이미 자기 차지임에도 못 챙긴다는 뜻으로 “사발안의 고기도 놔 주겠다”, 는 말이 있는가하면, 한 가지 일에 재미를 붙이다가 다른 일에 손해를 본다는 뜻으로 “흰 죽 먹다 사발 깬다.”라는 속담 따위가 있듯이 사발은 예전 우리의 삶 속에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었습니다.

옛 얼레빗 (2012-07-02)



2333. 7월 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서거 80주기

.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이는 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 그러나 이미 내 전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끊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런 추상같은 기개의 시를 남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 이상룡 선생은 1932년 7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선생은 정통 유학자로 99 간이나 하는 넓은 집에 살았지만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들을 해방한 것은 물론 재산 모두를 털어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 노블리스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로 꼽힙니다.

선생은 고향인 안동에서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적 유림 인사들과 함께 근대교육기관을 세우고, 계몽활동에 힘을 쏟다가 계몽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50이 넘은 나이에 온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넘어갑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혹한의 황무지 땅에서 선생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191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 본격적인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셨지요.

7월 1일은 이상룡 선생 서거 80주기입니다. 결코, 조선인이 일본의 종이 될 수 없다는 불굴의 겨레사랑 정신을 실천하다 가신 이상룡 선생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관심이 없음에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나마 일부 민족을 걱정하는 시민단체만이 잊지 않고 이상룡 선생을 추모하고 그 얼을 새기는 행사를 열어 위로가 될 뿐이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당당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데는 독립투쟁에 온몸을 던진 이상룡 선생을 포함한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www.koya-culture.com
사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