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로 속임수를 쓰는 선수에게 관심 없다.”
리우 올림픽 남자수영 400m에서 우승한 호주의 맥 호튼이 경기 전 한 말이다.
그는 기자가 약물복용자인 중국의 수영선수 쑨양과 같이 경기하는 소감을 묻자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쑨양은 2014년 말, 국내 대회 참가 도중 도핑테스트에 걸렸다. 그가 먹었던 트리메타지딘(trimetazidine)이란 약은 협심증에 쓰이는 약으로, 쑨양은 심장 치료를 위해 이 약을 먹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2008년부터 심장약을 먹었으며, 국제대회에서 심장 문제로 1500m 경기를 포기한 적도 있으니, 그의 심장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약은 흥분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2014년 1월 금지약물 리스트에 올랐기에, 그는 졸지에 부정한 약물을 사용한 선수, 일명 ‘약쟁이’가 됐다. 중국수영연맹은 그에게 3개월의 출장정지처분을 내렸다. 쑨양에게 약을 처방한 의사에게 자격정지 1년이라는 중벌이 내려진 걸 보면, 중국 측에서는 의사의 잘못이 더 크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쑨양이 ‘약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수영 전문지에 실린 관련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쑨양, 정말 실망했다.” “난 더 이상 네 팬이 아니다.”
팬들이 이럴진대 같이 뛰는 선수들의 생각은 어떨까? 4년 전 쑨양을 보며 자신의 꿈을 키웠을 맥 호튼의 발언은 약물에 대한 수영계의 입장을 잘 보여 준다. 중국 팬들은 호튼 선수의 트위터에 몰려가 그를 욕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글을 남기고 있지만, 그런다고 ‘약쟁이’가 ‘약쟁이’가 아닌 게 되는 건 아니다.
“그동안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박태환이 400m 예선에서 결승진출에 실패하자 해설을 맡은 노민상 전 감독이 한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박태환은 2014년 9월 불시에 시행된 도핑검사에서 금지약물인 네비도가 검출되는 바람에 아시안게임 메달 박탈은 물론, 1년 반 동안 선수자격이 정지되는 중징계를 받았다
징계 기간을 다 소화한 후에는 약물을 사용한 이에게 국가대표 자격을 3년간 박탈하는 대한체육회 규정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게다가 박태환은 우리 나이로 28세, 수영선수로서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다. 훈련에만 매진해도 메달을 딸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신경을 썼으니 좋은 성적을 거두긴 어려웠다.
런던에서 은메달을 땄던 200m에서 조 최하위에 그친 걸 보면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그는 약물검사에 걸린 게 의사의 실수라고 주장하나, 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은 원래 중년 남성들에게 남성호르몬을 주사하는 게 주 업무였다. 이런 병원을 찾아가 주사를 맞은 건 고의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네비도는 쑨양이 먹은 약과는 차원이 다른, 반도핑기구가 최우선적으로 금지하는 약이니, 설령 모르고 맞았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한체육회가 규정을 내세워 박태환을 리우에 보내지 않으려 했을 때, 여론의 절대다수는 박태환 편을 들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박태환은 고의로 주사를 맞은 게 아니다. 둘째, 이미 처벌을 받았는데 출전을 못 하게 하는 건 이중처벌이다. 셋째, 박태환 말고 우리나라 수영선수 중 메달 딸 사람이 누가 있느냐. 첫 번째에 대해선 이미 얘기했고, 두 번째 주장은 이미 체육회가 규정을 철회했으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내가 문제 삼는 건 바로 세 번째다. 그들 말대로 박태환은 당분간 우리나라에서 나오기 힘든 걸출한 수영선수다. 선수로서 환갑이 지난 나이임에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커다란 격차로 1위를 차지한 걸 보면, 그를 대표팀에 선발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메달이라도 하나 딸 수 있을지. 박태환이 국제스포츠 중재재판소(CAS)에 제소하는 등 대표로 나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나라는 더 이상 못살고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가 아니다.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하나 더 딴다고 해서 세계가 우리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호튼의 발언에서 보듯 부정한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나간다면 그거야말로 나라 망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규정을 철회해가며 박태환을 리우로 보냈다. 그걸 보면 우리나라의 국민의식은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져 있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떠받드는 후진적인 풍토, 그것이 이 나라의 온갖 부정부패를 낳는 이유였다. 논문을 조작해도 수백조원 국익을 창출할 원천기술이 있다는 이유로 영웅시하고, 선거에 부정이 있어도 일단 당선되면 다들 고개를 조아리는 나라에서 나만 떳떳하게 산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한 누리꾼이 쓴 댓글이다. “외국에서 태어났다면 훨씬 대단한 선수가 됐을 텐데, 못난 나라에서 태어나서 이 꼴을 당하는구나.” 사실이 아니다. 박태환이 지금 영웅일 수 있는 건 이 못난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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