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유학생이던 소설가에게는 한국말보다 일본말이 더 익숙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말로 공부하고 생활했으니 어떤 말을 하려 할 때 머릿속에 일본말 표현이 먼저 떠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을 써 나갈 때는 일본말로 떠오르는 생각을 한국말로 옮길 때가 더 많았으며, 오히려 적당한 한국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는 유명한 작가의 고백은 충격적인 사실이다.
어디 그뿐이랴.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명 인사들이 남긴 글에는 걸러지지 않은 영어 번역 투가 넘쳐났다. 이전 세대가 그랬듯이 미국 유학생들은 영어 표현을 익숙하게 썼고 논문과 기사 등 공식적인 글에 학식을 자랑하듯 영어 번역 투를 남겼다. 흔히 신문과 교과서에 실린 글을 두고 학생들에게 권장되는 모범 글이라 한다. 더구나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자주 만나던 작품이라면 학생들이 거의 외우다시피 할 지경이다. 그런데 거름망에 걸러 보면 과연 그러할까? 그런 글이 번역 투로 써져 있었다면, 현재 국민 대다수가 잘못 알고 있는 오류 표현이 얼마나 많을지 뻔한 일이다. 우리말인 척 숨어 있는 번역 투 표현에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금요일에 회의를 가지고자 합니다.’, ‘모임을 가지려 합니다.’와 같이 어휘를 번역한 사례를 종종 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회의나 모임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면 되는 것이다. ‘회의를 하려고 합니다.’가 더 자연스러운데도 굳이 ‘가지다’로 표현하는 것은 ‘have a meeting’에 끌렸기 때문이다. ‘이 과자는 단맛이 있다.’는 ‘이 과자는 달다.’로 충분하다. 어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법이 번역되거나 그대로 쓰인 경우도 있다. 글에서는 으레 쓰이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우리 학교에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등의 ‘~에 있어서’, ‘작가와 독자와의 만남’과 같은 ‘~와의’ 등은 우리말 문법에는 없는 표현이다. 각각 ‘~에’나 ‘~에게’, ‘~와’로 바꿔 쓸 때 더 자연스럽다. 동요 ‘고기잡이’에서 각인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의 ‘까나’도 우리말 문법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남의 둥지에서 알을 깐 뻐꾸기처럼, 어느 나라의 어휘와 문법이 우리말인 척 여기저기에 들어앉은 모양새다.
조금 더 긴 표현이 그대로 직역된 표현도 많다.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처럼 꼬여 있는 말은 ‘cannot help doing’의 직역 표현이다. ‘오늘 안에 해야 합니다.’와 같이 적절한 우리말이 있다. ‘마시자, 한 잔의 술, 한 잔의 추억’은 말 그대로 추억 속의 노랫말로나 할 말이다. 한글학교 아이들이 볼 동화책 제목을 ‘두 마리 염소’로 붙이면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주장도 들었다. 그러나 실생활 속에서 ‘나는 한 명의 오빠가 있고, 어제 한 접시의 불고기를 먹었고, 오늘 한 마리의 통닭을 샀다.’처럼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한 번쯤 돌아보지 않겠는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손을 번쩍 들면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 ‘좋은 아침!’이란 대사는 누가 봐도 ‘Good morning’의 직역 표현이다. 그러나 방송에 자주 노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다. 방송에 나오지 않았던 ‘좋은 점심, 좋은 저녁’은 아직 어색해하는 반응과 대비된다. ‘간발의 차이’, ‘생각에 다름 아니다’와 같은 일본말 관용 표현까지 한국말인 듯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번역 투 표현일지라도 거울을 보면서 스무 번만 말하고 나면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던데, 딱 그 말과 같다.
번역 투처럼 어색한 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방법이 있을까? ‘요즘 책이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지 않습니다.’라는 예를 보자. ‘읽혀지다’는 우리말에 없는 이중피동 표현이다. 이중피동 표현까지 쓰게 된 이유는 이 문장의 주어가 사물인 데 있다. ‘읽다’라는 행위는 사람이 하는 것인데 사물을 주어로 앞세웠으니 피동문이 되어 버렸고, 피동문에 서툴다 보니 문법도 틀리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을 사람을 앞으로 보내서 다시 말을 만들어 보자.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습니다.’로 문장이 정리되면서 피동표현도 사라졌다. 예 하나를 더 보자. ‘무엇이 우리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라는 예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을 앞으로 보내서 문장을 다시 정리해 보면, ‘우리 학생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가 된다. 행위의 주체인 사람만 앞으로 보내도 문장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남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 번역 투는 소통을 막는 장애물이다. 번역 투를 따라 쓰면 말의 머리와 꼬리가 안 맞는 비문도 더 자주 나오고, 모르는 말을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따라 쓰다가 실수도 한다. 누군가의 글, 어디서 본 듯한 글을 따라 쓰는 것은 낡은 관습이다. 우선 자기가 하려는 말을 한번 되짚어 보자. 자기가 이해 못한 것은 남들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찻잔에 맑은 차만 담듯 ‘생각 거름망’을 펼쳐 보자. 단언컨대, 꼬인 말로 ‘있어 보이는 표현’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글: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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