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가려고 기차역에 갔을 때였다. 대합실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에서 정부 정책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수어통역사가 한국어를 한국수어로 통역하고 있었다. 어느새 수어가 우리 사회에 낯설지만은 않은 언어가 되어 있었다. 정부 정책 발표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송 화면 우측 하단에서도 수어 통역을 볼 수 있고, 각종 행사, 토론회 등에도 수어통역사가 배치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가끔 지하철에서 수어로 대화하는 농인들을 보기도 한다.
수어가 대중 매체에 많이 노출되면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는 일이 늘어났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은 “수어는 만국공통어인가요?”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스처와 비슷하게 손, 머리 그리고 몸을 이용해 말을 하는 언어이다 보니 모든 나라의 수어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어도 음성 언어처럼 농인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므로 나라마다 다르다. 아래 사진처럼 의미가 같은 수어라도 한국수어와 미국수어의 표현이 같지 않다.
▲ <한국수어사전>의 ‘나무’
▲ <미국수어사전(ASL Signbank)>의 ‘Tree’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은 몇 명이나 될까? ‘2020년 한국수어 활용 조사’(국립국어원)는 청각 장애(심한 장애)가 있는 20세 이상 등록 장애인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는데, 의사소통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수어라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54.2%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보건복지부 장애인 등록 현황(2020년 12월 말 기준)에 따르면 청각 장애인(심한 장애)은 92,951명이므로 이 중에서 54.2%인 5만 명 정도를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농인의 가족, 수어 전문가 등까지 고려한다면 수어 사용 인구는 더 많을 것이다. 이처럼 농인과 그 가족, 관계자 등이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수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도 많이 열악하다. 수어를 대신해 한국어로 필담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인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와 같다. 한 번도 들어 보거나 말해 본 적이 없는 언어를 유창하게 읽고 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농인은 자신의 언어로 소통하고 교육받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다행히도 오랜 시간 지속된 농사회의 투쟁으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며 ‘한국수화언어법(2016)’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한국수어가 한국어와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밝히고, 한국수어의 발전 및 보전의 기반을 마련해 농인과 한국수어 사용자의 언어권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수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는 국가의 노력과 함께 수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수어를 배울 때 수어 어휘의 의미가 궁금하면 주위에 있는 농인이나 수어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 있고, 적절한 사람이 없다면 ‘한국수어사전’을 이용할 수도 있다. ‘한국수어사전’은 2005년에 종이 사전으로 편찬된 ‘한국수화사전’을 보강하여 인터넷 사전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종이 사전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수어의 입체적 움직임이 영상으로 옮겨지며 정확한 동작으로 살아났다. 이 사전은 우리가 흔히 보아 온 음성 언어 사전과는 다르게 수어 표제어가 동영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한국어로 수어 어휘를 찾는 방법에 더해 수어의 구성 요소인 수형(손 모양)으로 찾을 수 있는 기능도 있어 수어에 대응하는 한국어 표현을 알지 못해도 원하는 어휘를 검색할 수 있다.
아래의 수어 동작은 인사를 할 때 사용된다. 농사회에서는 이 수어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서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본다면 내 세상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 곁으로 한 걸음 다가온 수어, ‘한국수어사전’에서 인사말이라도 배워보면 어떨까? 우연한 기회에 농인을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다면 그만큼 나의 세상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글: 이현화(국립국어원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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