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은 새말을 즐겨 쓴다. 참신한 새말은 유행어가 되기도 하지만, 특히 또래들과 동질성을 느끼려는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면서 은어가 되기도 쉽다. 인류사를 통틀어 어느 때든 새로 생기는 말이 없었으랴. 사회와 문화가 바뀌면 새말은 생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 사회는 새말로 인한 의사소통의 책임을 청소년의 언행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온라인상에는 ‘한 해의 신조어’가 발표된다. 새말은 한 해를 살아 낸 사람들이 어떤 생각에 공감했는지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가늠하게도 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2020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코로나19 사태이다. 지구촌 모든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바이러스는 경제, 사회, 소비, 문화 등 전 분야에 ‘비대면 생활’을 중심으로 새말을 남겼다. 회사에 출근하듯 호텔로 출근한다는 ‘재텔근무’, 타인과 분리하여 쉰다는 ‘모캉스’, 마스크를 벗은 모습이 상상한 바와 많이 다르다는 ‘마기꾼’ 등은 비대면 생활을 소재로 한 새말이다.
쉽고 재미있는 표현을 지향하는 새말은 드라마의 유행어를 따라하거나 모방하기도 하고, ‘박박(대박), 짜짜(진짜)’처럼 단순화하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새말의 대부분은 줄여 만든 말이다. 영어는 Personal Computer(개인용 컴퓨터)를 PC(피시)처럼 첫 글자로 줄이지만, 한국어는 음절 하나하나를 모아 줄인다. 예를 들어, 물자를 절약하자던 ‘아나바다 운동’은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쓰다’의 준말이었다.
2020년에도 ‘억까(억지로 까내리다), 반신(반말 신청),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이 등장했다. 직장인이 ‘워라밸(일과 생활의 밸런스)’이라 할 때, 학생들은 공부와 휴식의 균형을 말하며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을 생성했다. 외국어도 한 음절씩 줄인 것에서 보듯, 새말 형성에 가장 강력한 기제는 준말이다.
한 해를 더 올라가 봐도 준말에 기대는 새말 생성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 2019년의 신조어를 보면,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만반잘부(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 등 준말이 대부분이다. 물론 인플루언서(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 티키타카(잘 맞는 사람들이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 등 외국어에서 유래한 말도 많다. 그런데 외국어도 준말 기제가 작동하면 여지없이 줄여진다. ‘편스토랑(레스토랑과 편의점의 합), 번아웃 증후군(무기력한 상태의 지속), 파이어족(자발적 조기 은퇴), 세포 마켓(혼자 상품을 광고하고 판매하는 방식) 등은 우리말과 외국어를 결합한 줄임말이다.
사실 새말은 사회 변화나 특성을 반영하면서 사회적 부조리를 풍자하는 역할도 했다. 기성세대에 대한 ‘라떼는 말이야’나, 대학입학시험에 사활을 거는 한국 사회에서 나온 ‘수능금지곡’이란 말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유행한다는 새말이 수년간 하나같이 준말 일색인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 준말 생성의 주체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다. ‘홈술(집에서 술을 즐기는 것)’, ‘1코노미(1인 경제)’, ‘편맥러(편의점에서 맥주를 즐기는 사람)’, ‘내또출(내일 또 출근)’과 같은 말은 청소년들이 만든 말이 아니다. 그들의 삶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며 자라나는 청소년은 어른들의 언행을 스스럼없이 따라한다. 사실 2021년 현재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세대는 20여 년 전 청소년일 때 신조어를 만들어 냈던 주체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 매체 사용이 급증하던 2000년대 초반에 새말이 양산되었다. 소통 방식이 바뀌면 새말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새말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당시의 청소년들이 지금 청소년들에게 언어 소통의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종종 본다. 한 걸음 물러서 보면 기성세대가 의사소통의 편리성으로 파 둔 함정에 자신의 아들딸이 빠지는 모양새인데, 자신은 ‘바담 풍’이라 말하면서 ‘바람 풍’이라 한다는 훈장의 비유와 무엇이 다른가?
언뜻 보면 준말은 참신하고 재미나 보인다. 그런데 청소년에게 준말은 스스로 놓는 덫과 같다. 청소년들이 집단에서 사용할 소통어로서 준말을 쓰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은어나 유행어만으로 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편리할지라도 준말은 언어 능력과 사고력 신장에 치명적인 덫이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는 먼저 ‘밥을 먹어요.’를 배운다. 처음부터 ‘밥 먹어요.’로 배우면 나중에 ‘밥이 먹어요.’처럼 말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을’을 빼는 것은 쉽지만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별도로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배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청소년의 시기는 앞으로 사회에서 할 일을 준비하며 필요한 말을 제대로 배워 가는 때다.
어른들이 만든 준말이라는 늪에 ‘미래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해야 할 청소년이 서서히 빠져들었다. 늪이 심각한 까닭은 ‘이게 아닌데?’ 하는 순간에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이라는 데 있다. 우선 말 줄이기 늪을 만들고 있는 기성세대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기성세대가 이를 계속 정당화한다면 바로 어른들 때문에 세대 간 소통 단절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언어 사용의 주체로서 자신의 사고와 말을 지키려는 생각을 함께해야 한다. 유행어와 더불어 사전에 올라 있는 말을 모두 알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아를 성취하려면 세대를 넘어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갈 말을 정식으로 알아야 한다. 그것을 배울 때가 ‘학창시절’,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글: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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