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100년 전 우리말 풍경 - 100년 전 해외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

튼씩이 2021. 12. 8. 12:52

‘디아스포라(Diaspora)’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본래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고유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디아스포라가 일반적인 이주 공동체와 구별되는 점은 이들이 현지 사회 집단과 분리되어 고립된 생활 공간을 이루고 있으며, 떠나온 땅을 찾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갖고 강하게 단결하는 민족 공동체라는 점이다.

 

한국인들의 집단적 해외 이주가 시작된 20세기 초부터 세계 곳곳에 한국어 디아스포라가 생겨났다. 그 전에도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국가가 인정하는 정식 이민은 1903년 하와이 노동 이민에서 시작되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인부로 일하기 위해 이민선에 오른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 수민원*에서 발급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수민원(綏民院): 대한제국 때에, 궁내부에 속하여 외국 여행에 대한 사무를 맡아보던 부서.
광무 6년(1902)에 두었다.

 

 

▲ <그림 1> 국한 혼용문과 영문으로 작성된 대한제국 해외여행장(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소장):
안재창(安載昌)의 여권으로 목적지는 미국 포와도(布哇島, 하와이를 뜻함),
여행 목적은 농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7천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다. 하와이 곳곳의 농장에 흩어져 고된 노동에 종사하던 이들 중 일부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더 좋은 일자리나 교육의 기회를 찾아 미국 본토로 건너가거나 하와이에 남아 세탁소, 양복점 등을 운영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해외의 한인들은 국내외의 동향을 파악하고 현지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노동 이민을 떠난 한인 중에는 영어 등 현지어에 능통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도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한인 사회의 출판물은 대부분 한글로 발행되었다.

 

▲ <그림 2>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공립신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일부 제목과 본문 내 숫자 표기에만 한자가 쓰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905년에 창간된 『공립신보』와 그 후신인 『신한민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1909년에 창간된 『신한국보』와 그 후신인 『국민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각각 1908년과 1912년에 창간된 『해조신문』과 『권업신문』 등 20세기 초 해외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은 한국어 디아스포라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 <그림 3>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행된
『신한국보』(독립기념관 소장)

 

▲ <그림 4>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해조신문』(독립기념관 소장)

 

 

▲ <그림 5> 『해조신문』(1908.4.26.) 의연금 모집 광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뒤
감옥에 갇히자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이들을 돕기 위해 의연금 모집 광고를 냈다.

 

 

해외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들은 현지 교민들에게 필요한 소식들을 전해 주었을 뿐 아니라 국내와 해외 현지, 그리고 해외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인 사회를 서로 연결해 주었다. 특히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신문들이 정간 혹은 폐간되는 일이 많아진 상황에서 이들 신문은 국내의 언론이 담당하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해외 한국어 신문들은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들을 지속적으로 게재하였고 국내외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보도했다.

 

 

▲ <그림 6> 「독립전쟁 시작하세」,『공립신보』(1907. 8. 9.):
무장 투쟁을 주창하는 기사

 

 

▲ <그림 7> 「한국 독립군과 독립당 용감」, 『신한민보』(1920. 7. 8.):
일제에 맞서 싸운 한국 독립군을 치하하는 기사

 

 

한편 이들 신문은 국내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광고란을 두었는데, 각종 상점·투자금 모집·야학 운영·한국 식품 및 서적 수입·한국행 선박의 출항 시간 등 광고의 내용을 통해 20세기 초 해외 한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그림 8> 『해조신문』(1908. 5. 21.)에 실린 명함 제작 광고

 

 

▲ <그림 9> 『국민보』(1936. 12. 30.)에 실린 재봉점 광고

 

 

▲ <그림 10> 『신한국보』(1909. 2. 12.)에 실린 공립신보사 제작 독학용 영어 교재 광고:
영어 대화 “룩히어(Look here)!” “화이(Why)?”로 제목을 달아 눈길을 끌었다.

 

 

외국어 교육과 해외여행이 일반화되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오늘날에도 해외에서의 생활은 시행착오의 연속이기 마련이다. 그러니 평생 고향 땅을 벗어난 적조차 거의 없었던 100년 전 한국인들이 이역만리에서 낯선 풍토와 문화를 경험하며 겪었을 고초는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고된 노동을 이어갔던 이들은 틈틈이 한글 신문을 읽으며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었고 고국의 정세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며 앞날에 대한 방책을 세웠다. 100년 전 해외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들은 이주 한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한국어 디아스포라들을 이어 주며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글: 안예리(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