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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실리테이터, 이제는 ‘소통지도사’

튼씩이 2022. 2. 16. 08:01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국민 참여 공론화 토론회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 재개 문제부터 대학입시제도 개선, 헌법 개정, 미세먼지 대책, 대구·경북 행정통합, KBS의 공적 책무와 같은 주제들이 정부 부처 공직자들 탁자에서 벗어나 국민이 참여하는 숙의형 정책 토론 마당에 폭넓게 펼쳐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가운데, 몇 해 전만 해도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맞대고 하던 대면 회의는 이제 열기 힘들다. 비대면 화상회의로 전환되면서 회의를 주관하는 주최 측의 고민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은 화상회의에서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또는 모더레이터(moderator)로 불렀는데 회의에 참여한 사회자들조차 이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퍼실리테이터는 ‘회의 촉진자’로서, 회의 참여자들의 소통과 협력이 원활하도록 돕는 사람을 뜻한다. 모더레이터는 참여자들의 의견을 조정 중재하여 문제 해결을 돕는 사람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두 용어를 때때로 혼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농어촌 마을 단위 공동사업이 잘 추진되도록 돕는 기관으로 농어촌공사가 있다. 마을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회의는 사업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 농어촌 주민들은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고, 마을사업은 모두가 참여하고 함께 결정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농어촌공사는 무엇보다 회의를 도와주는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지난 2017년 농어촌공사가 주관하는 자격 과정을 이수하고 재수 끝에 자격증을 땄는데, 이 자격을 얻은 사람을 부르는 공식 이름이 ‘농어촌 퍼실리테이터’였다.

 

“현장포럼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포럼에서는 우리 마을의 테마와 미션 그리고 비전을 세우고, 마을 자원을 활용해서 어떤 사업을 할지 의논할 거예요. 저는 오늘 회의가 잘되도록 도와드릴 퍼실리테이터입니다.”

 

마을 회의에 참여하는 주민들 대부분은 60대, 70대 어르신들이다. 마을에 따라서는 80대 이상 되는 분들이 많아 60대는 ‘어르신’ 호칭도 어색한 지경이긴 한데, 이분들 앞에서 포럼(forum)이니 테마(theme)니 미션(mission)이니 비전(vision)이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어렵다. 더욱이 ‘퍼실리테이터’라는 말은 뜻은 고사하고 발음조차 쉽지 않다. 주민들은 대뜸 이렇게 묻는다.

 

“포럼?” “테마니 미션이니 비전이니 그게 다 뭐여?” “퍼... 뭐라고?”

 

<2016년 전남 신안군 자은면 구영마을에서 열린 마을 회의 장면>

 

지난 몇 년 동안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때마다 뜻을 설명하느라 관계자들 모두 수고가 많았다. 다행히 얼마 전 농어촌공사는 이 같은 현장 사정을 헤아리고는, 공모를 통하여 퍼실리테이터라는 명칭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기로 했는데, 그 새로운 이름은 ‘소통지도사’였다. 바뀌자마자 이미 퍼실리테이터라는 말에 익숙해진 활동가들은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소통지도사라 하느니, 그냥 퍼실리테이터로 부르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겸양이 미덕인 우리 정서에 비추어 볼 때,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에게 ‘지도’ 운운하는 것이 여간 송구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생소한 ‘퍼실리테이터’라는 이름도 몇 년간 쓰다 보니, 어색한 태를 벗어버리고 일상 언어가 되었듯이 ‘소통지도사’도 그렇게 익숙해지리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단 퍼실리테이터라는 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아끼고 널리 쓰는 것은 민족의 얼을 지키는 가장 근본 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일을 앞장서서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있다면 문화체육관광부일 것이다. 되도록 정부에서 쓰는 행정용어나 이름 정도는 우리 말과 글을 쓰도록 행정지도(!)하면 좋지 않을까.

 

말 나온 김에 하자면, 적어도 대통령 신년사나 광복절 기념사 정도는 순우리말로 들어보고 싶다. 이 연설문을 초중고에서 읽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우리말글을 새기는 기회로 삼는다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 것인가. 우리 말글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해질 터이다. 온 세계가 한류에 감동하고 우리의 말과 글을 배워 보겠다고 난리인데, 정작 우리나라의 말과 글은 국적 없이 떠도는 외국말투성이 형국이니, 참으로 한류 광풍이 무색하다.

 

 

문제갑 농어촌 소통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