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고딕체의 나라, 일본
일본의 금융기관과 세무서, 경찰서, 소방서 등 공공 기관의 표지판에는 하나같이 ‘둥근 고딕체’를 쓴다. 역사명과 정류장 안내판을 비롯해 도로 표지판도 대부분 둥근 고딕체를 쓰고 있는데, ‘일시 정지’나 ‘횡단 금지’와 같은 경고 문구까지도 둥글둥글한 둥근 고딕체를 쓴다.
일본이 공공 기관이나 공적 표지판 서체로 둥근 고딕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체 디자이너 고바야시 아키라(小林 章)는 저서 ≪폰트의 비밀 2≫에서 일본은 사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부터 붓글씨로 표지판과 간판 등을 만들 때 둥근 고딕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 가장 적은 획수로 완성도 있게 쓸 수 있는 글씨체가 바로 둥근 고딕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멀리서도 읽기 편한 서체라서 인쇄술이 발달한 후에도 계속 둥근 고딕체를 사용하게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둥근 고딕체가 일종의 ‘공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사례만 보면 둥근 고딕체를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공공 기관에서 써 왔기 때문에 둥근 고딕체에 공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지 공공 기관이 써 온 관습으로 공적인 분위기가 생겨났다고 하기에는 최근 구미(歐美)에 불고 있는 둥근 고딕체 유행을 설명할 수 없다. 본디 유럽에서는 둥근 고딕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표지판이나 간판은 주로 산세리프체(sans serif體)가 압도적으로 쓰여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공공 기관과 표지판 서체로 둥근 고딕체를 선택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구미에서 둥근 고딕체를 공공물 서체로 쓰고자 하는 이유가 뭘까? 둥근 고딕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서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이유
고대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Pantheon)과 티투스(Titus) 개선문, 포로 로마노(Foro Romano) ― 로마 공회장 ― 비문에 쓰인 전형적인 고대 로마의 대문자는 이미 2,000년 전에 완성된 서체다. 그런데 이 서체가 현대에 와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아 활약하고 있다. 많은 명품 상표에서 이 서체를 차용해 상징이나 인쇄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대문자와 더불어 로코코 시대 이후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동판 인쇄 계열의 스크립트체(필기체의 활자)도 와인 라벨이나 호텔, 고급 레스토랑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고전 서체가 현대에 와서 재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상표 가치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고전 서체는 과거 번영했던 문명이나 사회상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 고급스러운 품격을 대변한다. 이는 명품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멋을 추구하는 것과 상통한다. 고전 서체에 귀족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명품 상표의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전 서체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다는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정통성’이라는 상표 가치도 창출한다.
고전적 아름다움을 좇아 고전 서체를 발굴하는 사례는 서체가 가진 영향력을 방증한다. 역사나 문화, 관습으로 형성된 서체 특유의 분위기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바뀌지 않으며 그 영향력에 따라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다시금 이용된다.
‘디자인’의 옷을 입은 서체
역사나 문화, 관습으로 형성되지 않은 서체도 새롭게 꾸미면 특별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일상에서 ‘폰트(font)’ 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서체에 ‘글자의 크기, 위 첨자, 아래 첨자, 강조 등’의 속성까지 모두 포함한 것을 말한다. 즉 서체를 다양하게 꾸민 것이다. 먼저 영화 광고지를 보며 꾸민 글자, 폰트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 살펴보자.
영화 광고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르, 즉 영화의 성격에 따라 쓰이는 서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동작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주로 직선적인 ‘고딕체’를 사용한다. 고딕체는 직선의 단단한 모양이 강하고 거친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영화의 성격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반면, 애정이나 희극 영화는 부드러운 질감이나 붓으로 그린 듯한 곡선 위주의 서체를 주로 사용한다. 왼쪽의 액션 영화 광고지 서체와 오른쪽의 애정 영화 광고지 서체가 바뀌어 사용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어울리는가? 어딘가 부조화스럽지 않은가?
우리가 즐겨 보는 텔레비전 속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서도 서체의 활약은 대단하다.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 출연진들의 마음을 다양한 서체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출연진들이 공포감을 느끼거나 소리를 지를 때는 글씨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불탄고딕체’를 사용하고, 표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출연진들의 미묘한 속마음은 구름 속에 글자가 풍덩 들어간 ‘구름M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또한 고급스러움을 표현할 땐 입체적이면서도 반짝반짝한 느낌의 서체를 사용하고, 어떠한 내용을 반어적으로 표현할 때는 진지한 느낌을 주는 ‘궁서체’를 사용하여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준다.
같은 뜻의 글자도 어떤 서체로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모양을 꾸민 글자, 그래서 서체는 ‘글자’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디자인한 옷을 입은 글자는 그야말로 생동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고바야시 아키라, 《폰트의 비밀 1》, 예경, 2013 고바야시 아키라, 《폰트의 비밀 2》, 예경, 2014
글_ ≪쉼표, 마침표.≫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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