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세간에 나온 책 중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장력이 좋아 22세 되던 해인 1439년(세종 21)에는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조정에 들어간 후 신숙주는 종종 장서각(藏書閣, 조선의 국가 사적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기관)에 들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을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읽는 등 책을 남달리 사랑했다. 어느 날은 신숙주가 장서각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세종의 어의(御衣)가 그의 등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신숙주의 학구열에 세종도 감동한 것이었다.
풍부한 독서량 덕분인지 신숙주는 언어 감각이 탁월했다. 그가 26세 되던 해인 1443년(세종 25) 국가에서 일본 통신사 변호문의 서장관(書狀官)을 뽑았는데, 서장관이라는 직책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는 중요 직책으로 당시 가장 뛰어난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글 잘하는 문관으로 정평이 나 있던 신숙주는 서장관에 낙점돼 일본 본토와 대마도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대마도주(主)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도 올렸다. 그로부터 28년 후인 1471년(성종 2) 신숙주는 이때의 일본 통신사 경험을 바탕으로 왕명을 받아 일본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책 ≪해동제국기≫를 짓는다. 일본의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 등을 담은 ≪해동제국기≫는 조선조 내내 일본과의 외교 문제에서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신숙주는 이두1)는 물론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1450년(세종 31) 명나라에서 한림 시강(翰林侍講)인 예겸과 사마순이 사신으로 왔을 때, 신숙주가 뛰어난 언변으로 사신들을 놀라게 했다. 예겸이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를 읊자, 신숙주가 곁에서 운을 맞춰 화답한 것이다. 이에 예겸은 본국으로 돌아 가 신숙주에게 시를 지어 보냈는데, “굴원2)과 송옥3)의 경지에 이르러 자랑스러운 명성이 조정과 민간에 충만하다.”라며 신숙주를 극찬했다. 외국어와 언어학에 능한 신숙주를 일찍이 알아본 세종은 그를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시킨다. ‘영명한 군주를 만나면 절세(絶世)의 대공을 세우게 된다’는 말처럼 신숙주는 ‘세종’이라는 날개를 달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다.
세종과의 운명적 만남
1443년(세종 25)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때 신숙주는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뽑혀 일본 본토와 대마도 땅을 밟고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 1년 후인 1444년, 세종은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와 성삼문, 손수산 등을 불러 중국 요동 땅을 다녀올 것을 명한다. 그곳에 명나라의 유명한 음운학자인 황찬이 귀향을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숙주 일행은 무려 13차례나 요동을 드나들게 된다. 그들이 황찬을 만나 무엇을 자문하고 어떤 연구를 했는지 전하는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훈민정음 연구와 관련된 일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설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성삼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선로 등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한 주역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자 세종은 신숙주에게 중국의 발음 책인 ≪홍무정운≫을 참고하여 우리말 실정에 맞게 한자음을 새롭게 정리한 발음 책 ≪동국정운≫을 만들도록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이를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동국정운≫은 훈민정음 창제 5년 만인 1448년(세종 28)에 편찬되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서 “만고의 한 소리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다.”라며 훈민정음을 극찬했고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라고 훈민정음의 이로움을 설명했다. 훈민정음의 언어학적 우수성을 꿰뚫어 본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의 ≪동국정운≫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국어 연구 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 못지않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신숙주의 어학 사랑은 후학 양성을 위한 교재 제작으로 이어졌다. 신숙주는 38세 되던 해인 1455년(단종 3) ≪홍무정운≫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홍무정운역훈≫(보물 제417호) 16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중국어 교육을 위하여 중국 자음을 소리글자인 한글로 기록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중국어 교육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중국 음운사 연구는 물론이고 한글 서체 변천사 연구와 활자 연구 등에 여전히 소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신숙주는 세종부터 성종 때까지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며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고, 정치적으로 추락하는 일 한 번 없이 살다 간다. 학자로서는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국조오례의≫의 편찬을 주도하는 등 학문적 업적을 계속 쌓아 나가는 복락도 누렸다. 하지만 단종이 아닌 세조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비난을 받았다. 신숙주가 세조 즉위를 모의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조 즉위 후 그는 세조의 사람이 되었다. 백성들은 신숙주의 변절을 욕했다. 잘 변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며 그를 희화화했다. 역사적으로는 신숙주가 절개를 저버리고 출세를 선택한 변절자의 본보기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인생에서 세종을 만났을 때의 활약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부분이다.
1)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표기법.
2) 굴원(屈原):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시인. 학식이 뛰어나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3) 송옥(宋玉):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궁정시인.
※ 참고문헌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박덕규, ≪신숙주 평전 – 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 둥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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