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언어의 숨겨진 힘 -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의 힘

튼씩이 2022. 5. 19. 12:51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또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아라비안나이트’라고도 불리는 ≪천일 야화≫는 인간의 그러한 특성을 극적으로 드러낸 이야기이다. ≪천일 야화≫에서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샤푸리 야르 왕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증오하게 된다. 그래서 왕은 날마다 새 신부를 맞이한 후 다음 날 동이 트면 아무리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더라도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그런데 왕은 ‘세헤라자데’라는 이름의 여인만은 죽이지 못했다. 세헤라자데가 밤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듣다가 동이 트면, 왕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세헤라자데를 하루씩 더 살려 주곤 했다. 그렇게 1,001일 동안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왕은 어느덧 여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고 세헤라자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힘’이 오직 설화나 이야기 속에서만 작용하는 것일까? 현실에서 활약하는 ‘이야기의 힘’을 만나 보자.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세요!”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말은 누구나 즐겨 쓰는 말이다. 손주가 조부모의 팔을 잡아끌며 하는 말이기도 하고,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아이가 잠을 청하며 부모에게 조르는 말이기도 하다. 수업에 지친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쉬어 가는 시간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하고, 연인들 간에 심심할 때 서로 주고받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구 상에 사람이 딱 두 명만 있어도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말이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재미를 느낄까?

 

1990년대 초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 리촐라티(Rizzolatti) 교수는 원숭이의 동작과 뇌 활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우연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원숭이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움직임과 관련된 뇌세포, 즉 뉴런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원숭이는 단지 다른 원숭이나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 보거나 듣고만 있는데도 마치 자신이 그 행동을 하거나 느끼고 있는 것처럼 동일한 활동을 하는 뉴런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다. 이 뉴런이 바로 ‘거울뉴런’이다. 이 뉴런은 다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면 마치 직접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똑같이 반응한다.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독자나 관객이 비슷하게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갈등 상황이 해소되면 독자나 관객도 똑같이 해방감을 느끼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재미있다. 특히 웃음을 유발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 받는다.

 

“내 이야기를 들어 볼래?”

 

인터넷에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 말은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1999년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존 닐(John D. Nilles)이 출간한 ≪호모 나랜스≫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특성을 반영한 이 신조어는 특히 정보기술[IT]과 혼합돼 주로 ‘디지털 공간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즉, ‘디지털 호모 나랜스’는 작게는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입소문 내는 사람이며, 크게는 누리소통망[SNS]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디지털 미디어로 공유하고 풀어내는 사람을 뜻한다.

 

디지털 호모 나랜스의 특징은 무언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재생산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수다쟁이’인 것이다. 호모 나랜스는 유튜브, 블로그, 누리소통망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수다 본능을 마음껏 펼치면서 동시에 댓글 등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즐긴다. 자기를 표현하는 동시에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공감’은 단순히 타인과 나를 연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인정과 존중을 주고받는 특별한 과정이다. 또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면 자존감이 상승하는 효과도 얻게 된다. 누구나 소통과 공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오늘날, 디지털 호모 나랜스의 출현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는 소통과 공유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De Beers)’는 이 광고 문구로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했던 다이아몬드를 세계에서 가장 비싼 보석으로 둔갑시킨 동시에 결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영구적인 다이아몬드의 속성에 변치 않는 사랑을 결부하여 다이아몬드 반지를 ‘영원한 사랑의 증표’로 만든 것이다. 드비어스는 해당 광고 문구를 50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다. 강력하면서도 대체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그 상품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되는 만족감을 얻게 된다. 이처럼 상표에 특별한 이야기를 부여하여 그 가치를 높이거나 새롭게 하는 것을 ‘상표 이야기하기[브랜드 스토리텔링, Brand Storytelling]’라고 한다.

 

이야기가 부여되면, 상품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을 증명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시사 평론가인 롭 워커(Rob Walker)는 지난 2006년, ‘무엇이 물건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가’를 실험했다. 그는 중고품 할인 가게에서 2달러 내외의 별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을 무작위로 구매한 후 작가를 고용해 각 물건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이베이(eBay)’에 사연과 함께 물건을 내놓았는데, 1달러도 안 되는 금액에 구매한 마요네즈 병은 51달러에 낙찰됐고, 1.29달러짜리 금이 간 말 머리 도자기 장식은 46달러에 낙찰됐다. 3달러짜리 토끼 장식은 무려 112.5달러에 낙찰됐다. 볼품없던 골동품에 이야기를 덧입히자 물건의 가치가 급상승하게 된 것이다. 이 실험은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며, 인간이 이야기에 대해 얼마나 높은 가치를 매기는가를 보여 준다.

 

나만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남몰래 숨겨둔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가치를 가볍게 보지 말자. 나의 이야기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엄청난 힘을 가진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참고 자료


카민 갤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 알에이치코리아, 2014.
그레고리 맨큐, ≪맨큐의 경제학≫, 교보문고, 2009.
양광모, ≪따뜻하고 쿨하게 공감하라≫, 마인드북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