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낙락장송으로 남은 지성인 성삼문

튼씩이 2022. 6. 29. 07:59

단종에 대한 마음을 시조로 읊조렸던 성삼문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지금도 널리 추앙받고 있다.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훈민정음의 보급에도 애쓴 성삼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몸이 주거 가셔 무어시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 성삼문

 

21세의 젊은 학사 성삼문

 

성삼문은 조선의 수재였다. 1435년 생원시 합격, 1438년 식년문과 급제, 1447년 문과중시 장원급제…, 성삼문의 화려한 이력이 이를 말해 준다. 세종대왕은 일찌감치 성삼문을 조선을 이끌어 갈 인재로 점찍고 1438년 21세의 성삼문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그리하여 성삼문은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한글 음운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나라 한자음의 통일

세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훈민정음이 백성들의 삶에 깊이 녹아들도록 하는 데에는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이 컸다. 집현전은 세종 이전부터 있던 기관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이를 대폭 확대해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발전시켰는데, 이곳에서 집현전의 학사들은 왕과 함께 각종 토론을 활발히 펼쳤고 서적 수집과 편찬, 왕의 정책 자문 등의 역할도 맡았다.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인 신숙주와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명나라 학자 ‘황찬’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중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골라 관청 공무 대신 집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는 사가독서 기간에 신숙주, 하위지 등과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내기도 했다.

 

사육신, 지조와 절개의 이름

집현전 활동에 참여했던 성삼문은 오늘날 사육신의 한 명으로 더 많이 기억되고 있다. 1453년,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 일부 대신들이 왕권을 무력화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였고, 2년 후에는 조카인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7대 왕(세조)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학사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때 성삼문 또한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과 함께 절개를 지켜 죽임을 당했고 훗날 이들은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다. 세조가 직접 성삼문을 심문하였는데 ‘하늘 아래에 두 명의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동국정운》: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운》 등을 참고하여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새로운 체계로 정리한 최초의 음운서

*《예기대문언독》: 《예기》의 경본문(經本文)에 한글로 토(吐)를 단 책으로 총 6권 6책으로 되어 있다.

 

[참고 문헌]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한국사전연구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