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재미있는 우리 속담 - 장 단 집에 가도 말 단 집엔 가지 마라

튼씩이 2022. 7. 21. 07:58

엊그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구수한 냄새가 제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어느 집에선가 메주를 쑤는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추억을 불러오는 데 후각만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바람결에 살짝 코끝을 스치는 흐릿한 냄새 하나만으로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기억까지 단 한 번에 ‘훅’ 하고 올라오곤 합니다.

 

식구가 많았던 어린 시절엔 이때쯤 온 가족이 달려들어 메주를 만들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일손을 거들었던 것 같습니다. 절구에 삶을 콩을 찧고 제 손으로 직접 메주를 빚어 나르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메주를 빚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고추장을 만들곤 했지요. 간장과 된장은 다시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 담그는 날이면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속 시끄러운 날 장 담그면 안 되니 오늘은 특히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장을 담그는 날이면 그릇을 깨뜨리거나 좋지 않은 일이 집에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시곤 했습니다. 그만큼 꺼리고 조심하는 일이 많으셨지요. 어린 마음에도 장을 담그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맛은 그 집의 음식 맛을 좌우한다고들 합니다. ‘장이 달아야 국이 달다’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장독을 정성스레 닦으시고 볕 좋은 날이면 아침 일찍 장독 뚜껑을 열어 햇볕을 쪼이시곤 했습니다. 비가 오려는 기미가 보이면 빨래 걷는 일보다 서두르시던 것이 장독 뚜껑 닫는 일이었지요. 이렇듯 정성을 들이다 보니 옛말에 한겨울에도 ‘장독과 아이는 얼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온도와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옹기의 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독은 장독일 뿐, 장독보다 더 중하고 귀한 것은 역시 장입니다. 그래서 ‘장독보다 장맛이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러나 장의 상징적 의미는 단순히 음식 맛을 좌우하는 조미 식품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옛 어른들은 장맛이 좋으면 그해 집안 운수가 길할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반대로 장맛이 좋지 않으면 집안에 우환이 닥칠 것을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장 단 집에 복이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장을 맛있게 잘 담글 수 있는 집은 그만큼 화목하고 따스한 기운이 넘치는 집일 것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걸 겁니다. 반대로 장맛을 살릴 수 없는 집은 가족들 사이에 어딘가 어긋남이 있는 집일 겁니다. 그러고 보면 복을 부르는 것도 사람이요, 화를 부르는 것도 사람입니다. 관계의 폭과 깊이가 살림살이의 넉넉함과 옹색함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예전에 어머님께서는 속상한 일이 있거나 화난 일이 있을 때 음식을 하면 이상하게 간이 잘 맞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장맛을 좌우하는 것은 어쩌면 장을 담그는 어머니의 마음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편안해야 장맛도 좋은 것이겠지요. 그러니 집안에 복을 부르고 일 년 사시사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단란한 가족생활을 누리고 싶다면 모두들 어머니의 속사정이 시끄럽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장 단 집에는 가도 말 단 집에는 가지 말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가족들끼리 입에 발린 말만 나누면서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화목함을 유지하는 집은 말이 달지만, 속내 깊이 인정스럽게 보살피고 살뜰하게 친밀감을 나누는 그런 집은 장이 답니다. 남들 보기 좋으라고 쇼윈도에 전시하여 자랑하는 화목함보다는, 냄새를 풍기며 은근히 맛을 잡아 주는 된장, 고추장처럼 겉으로 보기에 투닥거리고 삐거덕거리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속사정은 뜨겁고 은근한 화목함이 가족의 진정한 평화와 친밀함일 겁니다.

 

오랜 시간 묵혀야 장맛이 좋아지는 것처럼 가족 간의 사랑도 공을 들여 쌓아 가야 제 맛을 냅니다. 한순간의 갈등과 어긋남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는 속 깊은 곳에서 익어 가고 있는 묵직한 장맛의 비밀을 믿어 보는 게 어떨까요.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면 안방 깊숙한 구들장 아래 장맛이 무르익어 가듯이,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현실의 삶 속에서도 우리들 마음 안에서는 가족을 이어 주는 어떤 끈끈함이 천천히 익어 가고 있을 겁니다.

 

 

글_김영희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