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우리말을 여행하다 - 한글가온길 편

튼씩이 2022. 9. 7. 07:56

 

빼곡한 건물 숲과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회사원들의 모습이 날마다 펼쳐지는 서울 세종대로. 이 분주한 거리에 이야기보따리가 샘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길이 있다. 바로 ‘한글가온길’이다. 한글의 역사와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이 길을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와 함께 걸었다.

 

‘한글가온길’은 2013년 서울시가 한글 창제 570돌을 맞아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서울 세종대로 일대에 조성했다.
‘가운데’, ‘중심’을 뜻하는 ‘가온’이라는 순우리말을 써서 한글이 우리 삶과 역사에서 중심이 되어 왔다는 뜻을 담았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동상, 주시경 선생의 집터, 한글학회 등 한글과 관련 있는 이야기들이 길을 따라 촘촘히 이어진다.
오전 10시, 김슬옹 박사와 만나기로 한 한글회관으로 향했다. 김슬옹 박사는 ‘한글가온길’ 조성 당시 자문 위원이었다. 그는 ‘한글가온길’ 해설을 4년간 53차례 진행하고 『역사가 숨어 있는 한글가온길 한 바퀴』를 펴낸 한글학자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에 ‘한글가온길’을 소개하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안내를 맡아 주어 든든한 기분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 한글회관 맞은편에 한글의 역사 10가지 이야기가 전시돼 있다.

 

※ 한글가온길 전체 경로
한글학회(1구역)-주시경 마당(2구역)-세종 예술의 정원(3구역)-세종공원(4구역)-세종대왕 동상(5구역)-세종 생가터(6구역)
걸린 시간: 약 2시간

 

10:00 1구역 한글학회~2구역 주시경 마당

 

                                                                ▲ 한글회관 입구에 있는 주시경 선생 동상

 

‘한글가온길’은 모두 6구역으로 나뉜다. 꼭 순서대로 걸을 필요는 없다. 마음에 드는 구역부터 돌아봐도 무방하다. 이것이 ‘한글가온길’ 답사의 매력이다. 나는 1구역 한글회관에서 시작되는 경로를 택했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한글가온길 새김돌’. 버스를 타고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내려 구세군회관 방향으로 3분 정도 걷다 보면 ‘한글가온길’의 시작을 알리는 새김돌이 나타난다.
훈민정음 28자 중 현재 안 쓰는 자음 네 개 (ㆍ아래아, ㅿ반시옷, ㆁ옛이응, ㆆ여린히읗)와 ‘한글가온길’과 관련된 10가지 이야기 등이 새겨져 있다. 한글 여행을 기념하고자 새김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새김돌을 마주 보고 오른쪽으로 10미터만 올라가면 한글학회가 있는 붉은색 한글회관이 보인다. 건물 입구에서 주시경 선생의 동상이 우리를 반겨 준다. 한글학회는 1908년 주시경 선생이 국어연구학회를 만들며 시작됐다. 올해로 111돌을 맞았다. 주시경 선생은 양반 지식인들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글을 낮춰 부르길 거부했다. 그 대신 ‘오직 하나의 큰 글’이란 뜻으로 ‘한글’이라는 말을 지어 처음으로 사용했다.

 

한글회관 뒤 꼭대기 외벽에는 ‘나는 한글이다’라는 재미있는 조형물도 있다. 이 작품은 4차원의 한글 특성을 담았다.
1차원의 뜻글자인 한자, 2차원인 음절 글자인 일본 가나 문자, 3차원인 영어 알파벳과 같은 자모 문자, 바로 한글은 이런 문자들을 뛰어넘는, 소리와 문자가 일치하는 4차원의 자질 문자라는 것이다. 김 박사는 ‘한글가온길’에는 이와 같이 곳곳에 숨은 멋진 한글 숨바꼭질 조형물이 18개가 있는데, 바로 ‘한글가온길’ 답사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고명이라고 귀띔했다. 한글회관 맞은편 담벼락에는 한글의 역사가 10가지 이야기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져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일화부터 거리의 한글 이야기꾼 전기수,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소개문 등을 그림과 함께 볼 수 있다.

 

                                            ▲ 4차원 자질 문자인 한글의 특성을 표현한 ‘나는 한글이다’ 조형물

 

한글회관을 뒤로하고 2구역인 주시경 마당으로 향했다. 주시경 마당에는 책 보따리를 들고 있는 선생의 동상이 있다. 동상 바로 위에는 주시경 선생이 1910년에 남긴,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라는 글귀가 그의 신념처럼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서너 발자국쯤 옆에는 무궁화가 활짝 피어 있다. 평생을 조국의 말과 글에 바친 그의 모습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우리는 땀도 식히고 다리도 쉴 겸, 동상 옆 나무그늘 밑에 앉았다. 김슬옹 박사가 주시경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강의용 책 보따리를 든 주시경 선생의 동상

 

주시경 선생은 한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널리 보급하려 노력했다.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기사를 교정하던 그는, 원고를 고칠수록 한글 표기법의 정리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동료들과 ‘국문동식회’를 결성해 한글 표기법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1914년 39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면면히 흘러, 1921년에 주시경 선생의 뜻을 잇고자 조선어연구회가 조직됐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192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극로의 제안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조선어표준말모음』(1936), 『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1)을 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일제의 간악한 조선어학회 탄압을 극복하고 광복 후 1947년에 큰사전 첫째 권 발간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1957년까지 총 6권의 『큰사전』을 펴내는 등, 우리말 발전의 가장 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새삼 경외심이 솟구쳤다. 일제의 총칼 앞에도 꺾이지 않고 꿋꿋이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켜 온 덕분에 후손들이 우수한 한글을 편히 쓸 수 있으니까…….
그는 직접 세운 강습소뿐만 아니라 우리 말글 강의를 요청하는 곳은 어디든 나가 우리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어찌나 열정적이었는지, 학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책 보따리를 들고 한달음에 달려가 ‘주보따리’라고 불렸다.
근처에 주시경 선생의 집터도 있다. 현재 ‘용비어천가’ 오피스텔 자리다. 생가가 남아 있지 않아 직접 볼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주시경 선생의 말글 정신을 드높이려 지은, 오피스텔 이름 ‘용비어천가’가 뜻깊게 다가온다.

 

                           ▲ 자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들고 있는 호머 헐버트 동상

 

주시경 마당에는 호머 헐버트 동상도 있다. 헐버트는 우리말과 문화를 연구하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던 미국인 교육자이자 선교사였다. 1886년 고종이 세운 근대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육자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한글의 매력에 푹 빠져 한글 연구에 삶을 바쳤다. 그는 특히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1891)를 만들어 한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서재필이 1896년 창간한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남몰래 돕는 등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도 헌신했다. 사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모셔졌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조국보다 한국에 더 헌신했다고 평가받는 헐버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김슬옹 박사는 조금 씁쓸하다고 했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한국인이 아닌 불과 29세의 젊은 외국인이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럽고 아쉽기도 하다는 말이다.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말할 만큼 진심으로 한글을 아꼈던 헐버트. 아무 조건 없이 한글 연구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열정에 절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 단말모눈: 한쪽 면에는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등의 문장이, 다른 쪽 면에는 ‘감사’, ‘자유’ 등의 단어가 숨어 있다.

                                                    ▲ 삶의 나무: 나무처럼 자라는 우리의 삶을 표현했다.

▲ 바로 당신: 휴대전화 조명을 켜고 사진을 찍으면 손 안에 글씨가 나타나 기념 촬영하기 좋다고 한다. 아침이라 그런지 글씨가 뚜렷하게 찍히지 않았다.

 

주시경 마당 근처 곳곳에 숨어 있는 한글 숨바꼭질 조형물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문장과 단어가 숨어 있는 ‘단말모눈’, 삶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는 ‘삶의 나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앞에 서서 인증 사진을 찍기에 좋은 ‘바로 당신’ 설치물을 비롯해 한글을 다채롭게 표현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니 ‘이 길이 이렇게 재미있는 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새삼스러웠다.

 

11:00 3구역 세종 예술의 정원~4구역 세종공원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가면 세종 예술의 정원이 나온다. 3구역이다. 정원 입구에는 조선 시대 외국어 통번역을 맡았던 사역원, 전신 업무를 하던 한성전보총국의 자리를 알리는 새김돌이 있다. ‘평화와 화해의 나무’도 볼거리다. 2014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세계 각국의 평화와 화해를 뜻하는 말을 모아 나무 형상으로 만들었다.
사역원터 새김돌을 지나 더 뒤쪽으로 가면 멀리서도 눈에 띄는 큰 조형물이 나타난다. “하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형상화한 ‘서울의 미소’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순간 기분이 유쾌해졌다. 김 박사는 학생들과 이곳에 오면 그가 직접 개발한 ‘하하호호’ 한글춤을 가르쳐 주는데, 호응이 무척 좋단다.

 

                 ▲ 평화와 화해의 나무: 무쇠판에 평화와 화해를 세계 각국의 문자로 새겨 나무 모양을 만들었다.

                                        ▲ 서울의 미소: 한글의 아름다운 조형성을 살려 웃음소리를 형상화했다.

 

이 외에도 ‘안녕하세요’를 초성 자음으로 표현한 조명 기둥, 누구나 한글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는 의미의 ‘ㅈ이라 불리운 사나이’, 한글의 기본 자음 (ㄱ, ㄴ, ㅁ, ㅅ, ㅇ) 의 형태를 생성 원리인 음양오행에 따라 정한 위치에 배치하여 창제의 뜻을 되새긴 ‘음양오행 한글’, 연인을 한없이 기다리다 마음이 녹슨 어느 남자의 마음을 표현한 ‘그대를 기다림’ 등도 뜻깊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의 자음만 모아 인사하는 모습으로 만든 가로등  

▲ ‘ㅈ’이라 불린 사나이: 한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묘사한 조형물이다. 자세히 보면 윗부분에 사람 얼굴이 보인다.

 

세종문화회관 옆쪽에는 세종공원이 있다. ‘한글가온길’의 4구역이다. 11,172글자가 새겨진 한글 글자 마당이 있는 곳이다. 자세히 보니 글자마다 필체가 다르다. 김슬옹 박사에게 물어보니, 글자 수에 맞춰 11,172명의 사람에게 한 글자씩 쓰게 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 정성이 대단하다 싶었다. 공원 오른편에는 조선어학회한말글수호기념탑이 햇살 속에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말을 지키고자 희생한 조선어학회 33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려는 뜻에서 만든 탑이다.

 

                                                        ▲11,172자의 글자 조형물로 꾸민 한글 글자 마당

 

11:30 5구역 세종대왕 동상~6구역 세종 생가터

 

어느덧 ‘한글가온길’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햇볕이 점점 따가워지고 있었지만, 푹신한 운동화와 곳곳의 나무 그늘 덕분에 걸을 만했다. 우리는 세종 생가터부터 들렀다.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입구를 지나쳐 걷다 보면 세종이 탄생한 곳임을 표시한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기념비가 인도 위에 있다. 기념비는 어른 무릎 아래쯤 오는 아담한 크기라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 세종대왕이 탄생한 곳을 알려주는 기념비

                                                                   ▲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마지막으로 한글 역사의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세종대왕 동상을 보고 여정을 마치기로 했다. 세종대왕 동상이야 워낙 유명하고 자주 본 터라 그냥 지나칠까도 했지만, ‘한글가온길’을 걸으면서 세종대왕을 안 보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허전했다. 세종대왕 동상 주변은 1418년 22세의 나이에 임금이 되어 32년간 문화, 과학, 경제, 군사 등 모든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세종대왕을 기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동상을 살펴보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김슬옹 박사가 뭔가를 내밀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축소판으로 만든 앙증맞은 책자였다. 그가 정리한 한글 번역을 바탕으로 문관효 한글서예가가 직접 쓴 최초 한글판 손바닥책을 ‘한글가온길’ 여행 기념으로 준비했다는 것. 한글의 뿌리, 역사의 시작이 손 안에 담긴 듯해 뿌듯한 마음을 안고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오늘의 뜻깊은 한글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김슬옹 박사가 선물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축소한 한글판 손바닥책

 

아침에 만나 여정을 시작할 때 김 박사는 ‘한글가온길’ 답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글과 이 길에 푹 빠진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여름 한낮의 더위도 잊을 만큼 즐거웠으니, 그의 말이 백번 옳다.

 

 

 

글·사진: 정성민
자료 제공·감수: 김슬옹(세종국어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