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예향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소설가, 시인, 음악가, 화가 등 수많은 예술가를 낳았다. 특히 아름다운 글을 남긴 문인들이 많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정겨운 우리말을 재발견하게 된다.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대진고속도로를 5시간쯤 달리면 우리나라의 남쪽 끝인, 통영에 도착한다. 첫 목적지인 박경리기념관까지는 400킬로미터쯤 된다. 이토록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는 조금 남다르다. 그 흔한 먹고 쉬는 여행이 아닌, 느긋하게 우리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부슬비가 내렸다가, 다시 햇빛이 쨍하게 비춘다. 이번 통영 여행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함께다.
우리말을 따라 느루 거닐다. 박경리기념관
박경리기념관은 통영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산양읍에 자리 잡고 있다. 2010년에 문을 연 이 기념관은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소설가 박경리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뜻에서 건립되었다. 그의 작품과 생애를 알 수 있는 연보, 어록, 친필 원고, 풋풋했던 젊은 시절부터 원숙한 노년까지의 사진들, 서재를 재현한 공간 등을 볼 수 있다. 일생을 문학과 함께한 박경리 작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기념관에서는 그가 평소 집필하던 원주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이 특히 눈길을 끈다. 작가에게 서재란 연필 한 자루에 의지해 원고지 뭉치와 싸우는 치열한 전쟁터요, 가장 내밀한 공간이다. 서재에는 그가 생전에 몹시 아꼈다는 통영 나비장, 자개 장식 연필꽂이, 통영 바다 색을 닮은 쪽빛 두루마기 등이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책상 옆에 놓인 두꺼운 국어사전이다. 얼마나 자주 들춰 봤는지 겉표지가 반질반질하다. 평생을 글쓰기에 바친 작가에게 국어사전은 주옥같은 언어를 퍼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으리라. 그 안에서 가장 알맞은 언어를 건져 내려 부지런히 담금질했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통영이 무대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유족한 한 가정이 욕망과 운명에 휘말려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첫 장은 통영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중략)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맑고 푸른, 노오란 유자, 붉은 동백꽃……. 통영의 풍광이 머릿속에 원색으로 그려지는 생생한 묘사다. 단 몇 마디만으로 눈앞에 통영의 매력을 펼쳐 놓는 작가의 글솜씨에 탄복하게 된다.
박경리기념관 한가운데에는 통영 지역의 실사 모형이 있다. 여기에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북문안, 간창골, 서문고개 등이 표시되어 있다. 모형 앞에는 이 지역들을 배경으로 한 구절의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어 소설 장면을 떠올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기념관 바로 뒤편의 숲길은 박경리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방금 엿본 작가의 삶을 곱씹으며 잠시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공원길 곳곳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라는 그 유명한 구절과도 맞닥뜨린다. 마침 부슬비가 내려서인지 한결 운치가 있다.
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면 작가가 잠들어 있는 묘소에 다다른다. 관리인이 자주 들여다보는지 묘지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앞으로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서쪽 벼랑 마을에 올라
평소 흠모하던 박경리 작가를 만난 여운을 간직한 채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자 그의 생가가 있는 서피랑에 도착했다. 어감이 참 예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토박이말을 살린 지명이란다.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을 의미한다. 서피랑 골목 어귀에는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서문고개와 관련된 구절을 새긴 표석이 있다. 과거 통영 사람들은 이곳을 ‘서문으로 오르는 가파른 고갯길’이란 뜻의 ‘서문까꾸막’이라 불렀다.
서피랑에는 작가의 생가가 남아 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벽돌집이다. 현재는 그와 관계없는 사람이 살고 있어 집 안을 둘러볼 수는 없다. 담벼락에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곳이라는 작은 표지판만 붙어 있다.
박경리 작가의 생가가 있는 곳답게, 서피랑에는 그의 어록과 소설에 실렸던 문구들이 마을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다. 어쩌면 그저 낡고 오래된 마을로 남았을지도 모를 곳에, 아름다운 문장이 더해지니 빛바랜 담벼락조차 예술 작품처럼 멋이 묻어난다.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글귀들을 보며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른다. 마을 꼭대기의 서포루에 다다르면, 서호동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비탈을 따라 옹기종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아담한 지붕들이 정겹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어린 박금이(박경리의 본명)가 뛰놀던 곳이라 생각하니 눈앞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박경리 작가는 생전에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준다. 통영은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다.”라면서 통영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도 고향이 통영인 것은 큰 축복이고 특권이다. 삶이라는 스케치북의 첫 장을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의 색채로 흠뻑 물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글·사진: 정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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