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제 발 앞도 못 본다.’, ‘여자는 죽어야 철이 난다.’, ‘여자의 식견은 남자의 의견만 못하다.’ 모두 조선시대에 생겨난 여성 비하 속담이다. 예전 여자들은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기 때문에 사리 판단에 어두워 일을 저지르기가 쉽고, 일을 잘못 처리할 때가 있으며, 그 식견이 남자보다 못하다는 뜻을 각각 담고 있다. 조선의 여성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고, 남성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도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수의 부유한 가문 여성들이 대학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신여성으로 부상하였다. 반면 나머지 대다수는 구식여성 취급을 받았고, 일제의 탄압뿐만 아니라 극심한 성차별까지 겪어야 했다.
여성을 가르치지 않았던 조선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온갖 차별 속에서 보통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그럼에도 배움을 향한 조선 여성들의 열망은 뜨거웠고, 그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그들은 누구보다도 교육에 목말라 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교육운동가였던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이 인격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 직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공부하려는 여성을 허영심에서 비롯된 사치를 부리는 사람으로 여기던 사회였기에, 조선 여성들의 문해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차미리사 선생은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배우지 못해 서러워하던 수많은 조선 여성을 불러들여 이들이 앞으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했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차미리사를 아시나요?
차미리사(1879-1955) 선생은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외국에서의 학업 경험을 통해 자기 삶의 소명을 깨닫고 조선 여성의 교육과 계몽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 늘 아들을 원했던 선생의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자 이를 섭섭하게 여겼고, 어린 그를 ‘섭섭이’라고 부르곤 했다. 결혼 생활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차미리사 선생은 스물셋의 나이에 홀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그는 미국 캔자스 시에 있는 스캐리트 신학교에서 1910년부터 2년 간 공부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차미리사 선생은 “외국에 있느니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차미리사 선생은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서른넷의 나이로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조선여자교육회와 근화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힘썼고, 해방 후에는 자주적인 통일을 염원하며 국가수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통일을 보지 못하였고, 1955년 6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사후 47년만인 2002년, 정부는 민족의 독립과 여성 교육에 일생을 바친 차미리사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조선여자교육회, 문맹 퇴치를 위해 한글 교육에 힘쓰다
제한된 생활을 해야 했던 조선 여성들은 가사노동과 관련한 지식을 제외하고는 무지했다.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우선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920년 4월 19일, 차미리사 선생은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첫 부인야학을 열었다. 야학은 15세부터 40세까지의 모든 여성에게 열려 있었다. 전혀 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조금 받은 조선 여성을 위해 설립된 곳이 바로 조선여자교육회의 야학이었다. 이 야학이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의 토대가 되었고, 대학은 4월 19일을 창학기념일로 지정하여 민족과 여성을 위해 헌신한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 시기 차미리사 선생은 전국순회강연을 열어 보다 많은 대중과 만나려고 노력했다. 강연장에서 차미리사 선생은 “우리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첫째 알아야 되겠고 배워야 하겠다. 남자의 노리갯감, 남자의 노예 노릇을 하던 케케묵은 시대는 벌써 지난 지 오래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그는 늘 여성의 자아 확립과 인격적 독립을 강조했고, 이를 조선여자교육회 설립의 근본정신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차미리사 선생이 특히 중시했던 것이 바로 한글교육이었다. 다른 어떤 문자보다 배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당시 조선 여성들은 그조차 배울 기회가 없었다. 조선여자교육회에서는 한글 수업은 물론이고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작문 수업 또한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선 여성의 계몽을 위해 헌신한 차미리사 선생의 삶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닿아 있다. 전국순회강연을 시작했을 당시 차미리사 선생은 전국 어디에서든 늘 같은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차미리사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 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 보는 무식한 여성,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차미리사 선생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신념과 값진 가르침은 그로부터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덕성인들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아 있다.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김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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