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아 다르고 어 다른 우리말 - 정과 사랑

튼씩이 2022. 12. 24. 12:06

사계절 중 가장 추운 계절인 겨울이 돌아왔다. 우리가 겨울을 춥게 여기는 것은 단지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떨어지는 온도만큼 사람의 정이 더욱 그리워지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시려 오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면 아무리 매서운 영하의 날씨도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우리 삶에 온기를 더하는 ‘정’과 ‘사랑’은 어떻게 다르고 어떤 상황 속에서 쓰이는 걸까?

 ‘정’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동물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생기는 친근한 마음’이다. ‘정이 들다, 정이 가다, 정을 쌓다, 정을 나누다, 정을 주다, 정을 쏟다’ 등의 예는 대체로 그 같은 정의와 잘 들어맞는다. 어떤 사람이나 동물과 정이 들거나 정을 쌓거나 정을 나누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거나 자주 만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함께 어울리면서 희로애락을 같이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마음이 열리고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

 그렇지만 정이 반드시 사람과 사람(또는 동물)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장소나 물건,일 등에 대해서도 정이 생길 수 있다. ‘정든 고향’, ‘정이 가는 물건’, ‘화초 기르기에 정을 붙이다’ 등의 예는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정이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경우에는 ‘사물을 오랫동안 접하면서 생기는 친숙한 마음’이 좀 더 합당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어떤 문맥에서는 정이 좀 더 넓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추모의 정, 회황의 정, 석별의 정,연민의 정, 흠모의 정’과 같이 감정을 함의하는 명사와 함께 쓰이는 정은 친근하거나 친숙한 마음이라기보다 어떤 감정이나 기분을 느끼는 마음을 뜻한다. ‘고운 정, 미운 정’이라고 할 때의 정도 ‘곱게 여기는 마음, 미움을 느끼는 마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종종 정과 대비되곤 하는데, 다른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위하는 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정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이웃에게 사랑을/정을 베풀다
㉯ 자식에게 사랑을/정을 쏟다
㉰ 부부의 정/사랑, 혈육의 정/사랑

 사랑을 베푸는 것과 정을 베푸는 것, 사랑을 쏟는 것과 정을 쏟는 것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둘 다 어떤 사람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아끼고 위하는 마음을 베풀거나 쏟는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같다. 부부의 정과 부부의 사랑, 혈육의 정과 혈육의 사랑 또한 부부나 혈육 간에 서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정과 사랑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랑과 정은 서로 다른 서술어와 호응하기도 한다.

㉱ 그는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정(X)에 빠지고 말았다.
㉲ 두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한솥밥을 먹고 지내면서 정이/사랑(X)이 들었다.

 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정에 빠지기는 어렵고, 정이 들 수는 있지만 사랑이 들 수는 없다.

 이 같은 호응어의 차이는 두 단어의 상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곧 사랑은 순식간에 빠르고 뜨겁게 일어나므로 늪에 빠지듯 빠질 수밖에 없고, 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은근하게 일어나므로 과실에 맛이 들 듯 혹은 잎에 단풍이 들듯 시나브로 들 수밖에 없다. 사랑은 불붙기도 하고 사랑에 눈멀 수 있는 반면, 정은 불붙어 눈멀 수는 없지만 오래도록 쌓아 가면서 깊어지고 두터워질 수 있다. 이렇듯 사랑과 정은 진행 속도와 열정의 강도에서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그날 밤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을/정(X)을 나누었다.
㉴ 그날 밤 두 사람은 은밀히 정을/사랑(X)을 통했다.

 ‘사랑을 나누다’와 ‘정을 통하다’는 둘 다 성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나, 둘의 어감 은 다르다. 사랑을 나눈다는 말은 연인 사이의 성관계를 에두르거나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이 지만, 정을 통한다는 말은 간음과 같은 성관계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편 정은 ‘모정, 부정, 애정, 연정, 온정, 우정, 인정, 치정’과 같은 한자어와 상하의 관계를 이루는데 애정, 인정과는 부분적 유의어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정을 쏟다’나 ‘정을 주다‘의 정은 애정으로 바꿀 수 있고, ‘정이 많다‘나 ‘정이 넘치다‘의 정은 인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과 사랑은 고유어와 결합하여 다음과 같은 복합어를 만들어 낸다.

 

㉵ 덧정, 속정, 옛정, 잔정, 첫정, 풋정
㉶ 내리사랑, 속사랑, 옛사랑, 짝사랑, 참사랑, 첫사랑, 치사랑, 풋사랑

 속정과 속사랑, 옛정과 옛사랑, 첫정과 첫사랑, 풋정과 풋사랑은 정과 사랑이 그러하듯 닮 은 듯 다르다. 가령 옛정은 지난날에 맺은 정, 옛사랑은 옛날에 맺었던 사랑을, 풋정은 채 무르익지 않은 정, 풋사랑은 서툴고 풋풋한 사랑을 가리킨다.

 바야흐로 정과 사랑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며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살펴봐야 할 때이다. 때로는 따뜻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기도 한다. 이 세상은 나 홀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관계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부지런히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면 인생의 겨울도 견딜 만한 것이 되며 오히려 꽃이 피어나는 기적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글: 강은혜

※ 참고 자료

안상순, 『우리말 어감 사전』, 도서출판 유유,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