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이 ‘킬러 아이템(killer item)’이라는 외국어를 ‘핵심 상품’이라는 우리말로 다듬어 발표할 즈음인 2023년 10월은, 마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다가와 ‘킬러 문항’이라는 말이 한창 오가던 때였다. ‘킬러 아이템’과 ‘킬러 문항’. 둘 다 ‘킬러’라는 표현을 썼고, ‘결정적인 힘’을 가졌다는 뜻에서는 비슷하지만, 맥락은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킬러(killer)’의 뜻을 보자. 물론 사전상 첫 번째 의미는 ‘뭔가를 죽이는 사람, 살인자’라는 부정적 의미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매우 힘들거나 뛰어나서 죽여주는 것’이라는 풀이가 뒤따른다(옥스포드 영한사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킬러’라는 한글을 검색하면 배구의 주 공격수나 야구에서 특정 상대에게 승률이 높은 투수를 가리키는 말로 나온다.
오늘 살펴볼 ‘킬러 아이템’은 “우선 순위가 높고 핵심적인 상품”을 뜻한다. 즉, 소비자의 구매욕을 ‘치명적’이라 할 만큼 강하게 자극하는 업체의 전략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완제품’에 사용하고 있으나 ‘제작의 경우라면 핵심 부품을, 광고의 경우라면 중점 소재를 의미’한다(나무위키).
‘킬러 아이템’이 우리 언론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한 외국 통신업계 임원이 “한국의 이동통신 서비스 업체들이나 단말기 업체들이 각자 ‘킬러 아이템’을 갖고 세계시장에 도전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조언한 기사(<아이뉴스24> 2002년 3월)가 효시다. 이후 통신, 전자 등 첨단 산업에서 주로 쓰이던 ‘킬러 아이템’은 의류, 식품 등 넓은 분야로 퍼져나갔다.
2018년에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세 개 정부 부처가 배포한 ‘코리아세일페스타’ 관련 보도자료에서 “행사 기간 동안 소비자가 만족할 수준의 파격 할인품인 ‘핵심품목(킬러아이템)’을 제시할 ‘선도기업’을 공모를 통해 선정할 계획임”을 밝혔다.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 홍보자료에서 ‘핵심품목’이라고만 써도 충분할 것을 굳이 괄호 안에 영어 표현을 덧붙인 것은 아쉬운 사실이다.
‘킬러’를 사용한 관용어가 적잖은 만큼, 이미 국립국어원에서 다듬은 새말도 있다. ‘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를 ‘핵심 콘텐츠’, ‘돌풍 콘텐츠’로, ‘킬러 앱(killer application, 오랜 기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경쟁자를 압도한 소프트웨어)’을 ‘돌풍 앱’으로 바꾼 게 그 예다.
이번 새말 모임에서도 ‘킬러’에 대응하는 우리말로 역시 ‘핵심’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꼽혔고, 이와 함께 ‘대표’, ‘으뜸’도 적절한 표현으로 떠올랐다. ‘아이템’에 대해서는 ‘상품’과 ‘품목’이라는 단어가 저울질되었다. 그리고 그중 ‘용역’과 ‘재화’를 모두 아우르면서도 ‘핵심’이라는 단어에 더 잘 어울릴 만한 표현으로 ‘상품’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논의 끝에 ‘핵심 상품’을 1순위 후보로, 그 외 ‘핵심 품목’, ‘대표 품목’, ‘으뜸 상품’ 등을 후보말로 올렸고 여론조사 결과 ‘핵심 상품’이 최종 새말로 선정되었다.
끝으로, 앞머리에 언급한 ‘킬러 문항’이라는 말로 되돌아가보자. ‘킬러 문항’은 출제기관이 의도적으로 시험에 포함한 초고난도 문제를 가리킨다. 상위권 수험생들의 변별력을 따진다는 순기능을 표방하며 도입되었지만, 사교육을 조장하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교육부는 올해 수능에서 이를 출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킬러 문항’을 만난 수험생은 학교 수업에서 접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에 당황하고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야말로 ‘킬러 문항’은 수험생의 ‘목숨을 위협하는 킬러(살인자)’다. 따라서 이때의 ‘킬러’는 ‘핵심’ 혹은 ‘대표’라는 긍정적 의미로 갈음해서는 안될 터이니 ‘킬러 문항’을 우리말로 다듬는다면 ‘함정 문항’, ‘죽음의 문항’ 쯤이 어떨까 싶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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